외국인 가르치는 한국어교사 꼭 하고 싶던 일…돌이켜보면 아쉬워
꼬박 3주일 바쳐 한국어 교재 만들었으나 종강 1개월 앞두고 출간

안남영의 赤道일기(7)
전 HCN충북방송 대표

작년 1월5일 오전9시 1학년 요리2반 교실. 드디어 첫 수업이다. 설렘과 떨림이 교차했다. 아이들의 호기심 잔뜩 어린 시선 때문인지 가슴속에서 파장이 크게 느껴졌다. 내 영문 이름을 적고는 옆에 이곳 선생들이 이름지어준 ‘Anang’을 썼다. “하하, 아낭이래~!” 들뜬 웃음소리가 교실을 메웠다. 우리의 ‘붙들이’쯤 될까? Anang은 이곳 원주민의 흔한 아명이라 한다. 가수 이름에도 있으니 기억되기 좋을 뿐 웃음거리가 된들 어떠랴.
 

▲ 1년 전 반자르마신 제4기술고교 요리2반 교실에서의 첫 수업 장면. 자음 판서 순서가 틀린 걸 보면 떨긴 떤 것 같은데 그래도 여유 잡으려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한국어 수업 데뷔는 그렇게 시작됐다. 곧바로 이어진 한글 익히기. 한글을 공부해 봤다는 2명을 불러내 적게 한 알파벳 이름을 한글로 써 보이며, ‘알고 보면 쉬운 문자’임을 강조했다. 포인터로 책상 창문, 반자, 바닥 타일 등에서 자음을 그려 보이면서 그 연상 입력을 도왔다. 35명을 한 사람씩 발음시켜 보니 시간이 고맙게도 빨리 지나갔다. 교안도 없이 얼개만 머릿속에 넣고 들어간 데뷔 무대 치고는 진땀을 별로 안 흘린 것 같다. 현지어 구사의 한계를 절감했지만 왠지 모를 안도감에 뿌듯했던 하루였다.

한국어 교사. ‘국어 교사’와 달리 우리말이 모국어가 아닌, 즉 외국인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는 내가 꼭 해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다. 사실 그런 경험이 없지 않다. 2012년부터 2년 간 ‘청주이주여성지원센터’에서다. 당시 몸담고 있던 HCN충북방송에서 이곳에 여러 가지 도움을 줘 왔는데, 내친 김에 재능기부까지 한 것이다. 그땐 우리말을 좀 할 줄 아는 고급반 대상이어서 수업이 쉬웠다.

그러나 이곳은 왕초보 대상이라 그런 경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현지어 실력이 겨우 걸음마를 뗀 정도니 오죽할까? 타국에서 한국어교사로 어느덧 세 번째 학기를 맞은 요즘. 돌이켜 보면 보람과 자부심으로 ‘빛나는 계급장’을 만들어 달고 싶었는데, 한편으로 아쉬움이나 위로받고 싶은 심정이 없지 않다.
 

▲ 작년 이맘때 한국어 첫 수업시간에 만난 요리2반 아이들. 한국과 나에 대한 정다운 표정과 관심만큼 보답을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주당 20시간의 한국어 교육

생각건대 외국인에게 정확한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는 나 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이라는 ‘근자감’이 나를 여기까지 밀어붙인 것 같다. 우리말 실력―글쓰기 말고 지식―에 관한 한 자부해 온 만큼 언제부턴가 이 분야 재능기부가 자연스럽게 목표로 터 잡고 있었다. 시민기자 양성 프로그램 운영, 대학 출강, 관련 교재 집필, 특강 같은 이력 외에 뭔가 경력을 더 보태고 싶은 욕심도 여기에 작용했다.

2006년 한국어교사 자격증 제도가 시행되면서 이를 기웃거렸다. 몇 년 망설이다가 2011년 충북대에서 같은 과정을 이수하고 ‘한국어교원 3급’ 자격증을 땄다. 까다로운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거치면서 떨어질까 봐 조바심한 기억이 있지만, 한국어교육을 전공한 2급 경력자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치기일 뿐, 외국인 왕초보 상대로는 현지어 실력이 관건이란 걸 깨달았다.

한국어 과목은 내가 오면서 작년 2학기에 1학년 대상으로 처음 편성됐다. 대상은 15개 학급 중 요리, 관광, 호텔, 미용 등 4개과 10개 반에 330명. 주당 2시간씩 배정됐다. 시수 협의 당시 학교 측은 “전 학급을 가르쳐 줄 수 없느냐”며 주 1시간 혹은 격주 2시간을 제안해 왔다. 어차피 허드레 과목이겠지만 외국어 학습에 대한 무지와 목표부재를 드러낸 발상이라 속으로 반감이 스며나왔다. 나는 단호하게 “주당 2시간으로 하되 대상 학급수를 줄이자”고 했다.

▲ 한국어교재 제작비로 우리 돈 약 80만 원을 코이카 이름으로 교장한테 기부했다.

결국 주당 20시간으로 결정됐다. 인니어 초짜 치고 많은 시수를 소화해야 해서 좀 걸쩍지근했지만, 그래도 단번에 300명 이상 제자를 만나게 됐으니 보람이 비례하리라 자위했다.

수업에는 교재가 필수일 터. 한데 학교 측은 “굳이 교재가 필요하냐?”라는 거였다. 당시 내가 사용하려고 찜했던, 국제교류재단에서 인도네시아어로 만든 PDF파일 교재는 제1권만 500쪽이 넘었다. 막상 사용하려고 보니 그때그때 복사해서 쓰거나 책으로 만들기에 너무 방대해 비용문제가 뒤따랐다.

이런 이유로 교재 제작에 미온적인 교감에게 나는 “100쪽 남짓으로 내가 간추려 보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제작비는 코이카와 학교가 반씩 부담하자고 해서 동의를 얻어냈다―단원은 소속 기관을 위해 코이카로부터 연간 1,250달러를 지원받아 쓸 수 있다.

106쪽짜리 원고 완성했으나 출력안돼

1학기 방학―성탄절부터 1월3일까지―을 맞아 편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교재 PDF파일은 편집 사용이 불가능해 완전히 새로 엮어야 할 판이었다. 문법과 표현 중심으로 교수요목을 20개 단원으로 정리한 다음, 단원별로 대화문· 문법 설명· 구문 연습· 한국문화 팁 등으로 구성키로 하고 집필을 시작했다.

뒤에 배울 문법적 구문이 앞에서 불쑥 튀어나오면 안 되겠기에 이를 감안하면서도 생활밀착형 상황에 맞춘 예문을 만드는 일이 의외로 까다로웠다. 인니어 문법 설명은 위 교재를 참고했지만, 부족한 건 직접 쓴 뒤 한국어를 배운 현지 대학생들 도움으로 번역과 교정을 거쳐 완성했다.

열흘이면 될 것 같은 일이 3주 꼬박 걸렸다. 삽화와 사진을 고르고 적절히 배치하는 것도 그렇지만, 연습문제 만드는 일도 고되었다. 하루 15시간 안팎 몰두한 끝에 106쪽짜리 원고가 완성됐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한글’ 작성 문서라서 출력이 안되는 게 문제였다. ‘워드’문서로 변환했더니 제목, 본문, 표, 사진 등 배열이 모두 헝클어져 쪽맞춤 편집을 새로 해야 했다. 호환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 우여곡절 끝 4개월 만에 나온 나의 한국어교재. 저작권 시비를 피하기 위해 사진은 직접 찍은 것을 썼고, 일부 출처를 밝히거나 비매품 배포를 명시했다.

익숙지 않은 ‘워드’로 어렵사리 재편집하고 나니 이번엔 PDF파일 변환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다. 인쇄소로 넘기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데, 오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인쇄소 관계자나 학교 컴퓨터 담당자도 버전 충돌 가능성만 말할 뿐 오불관언이어서 그때그때 모든 수정은 내 몫이었다.

1월 하순 원고 완성 후에도 스트레스는 계속됐다. 코이카 지원금은 3월 중순에야 나왔는데 선불 없인 작업할 수 없다고 버티는 인쇄업자를 어쩌지 못해 1개월 이상을 그냥 까먹었다.

인쇄비 분담을 부담스러워하는 건 그렇다 치고 출판 지연으로 수업부실이 장기화하는데도 학교 측은 도무지 무관심했다. 380권 인쇄비 총액 중 50% 분담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 와서 20%(한화 약 20만 원)로 낮추는 걸 수용해 줬는데…. 업자의 늑장 탓에 책은 4월 중순에야 나왔다. 종강을 1개월 남겨놓고서다.

학교 측은 “어차피 늦었는데 다음 학기에 배부하자”고 했다. 결국 모범학급 하나에만 나눠주고 나머지는 책 구경도 못한 채 진급, 한국어와 이별했다. 아무튼 교재 제작 작업은 힘든 도전이었다. 완성도야 부끄럽다. 하지만 내가 한국어 교재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은 힘들었던 만큼 봉사활동의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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