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빌딩·세련된 도시 이미지와 선풍기도 없는 자카르타 고급식당
좀처럼 늘지 않는 인도네시아어 때문 고생…혼자 식당가면 ‘답답’

안남영의 赤道일기
전 HCN충북방송 대표

“길이 5천㎞의 다리를 놓겠습니다.”
작년 10월22일 나는 이렇게 거창한 포부를 밝혔다. 매년 가을 열리는 코이카 인도네시아사무소의 합동평가회의에서다. 단원과 코이카 직원 50여 명이 참석한 자리였다. 정말 실천의욕이 충만했을 때니,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 자카르타는 국제도시로서 날로 마천루가 늘어나지만, 어디든 시선을 돌려보면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색 풍경을 연출한다.

한국어 자원봉사 말고 자치단체나 대학까지 엮어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도 자못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치기와 객기가 어른거린다. 인도네시아를 알기엔 임기 2년이 너무 짧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어떤 나라일까? 지난해 10월5일 출국 비행기 안에서 연상되는 단어를 떠올려 봤다. 섬나라, 자원 부국, 무더위, 적도, 자연재해, 네덜란드 식민지, 굼뜬 국민성….섬이 1만7,500여 개란다. 한반도의 9배에 달하는 면적에 인구는 2억5,000여만 명으로 4위.

그 방대한 도서에 300여 종족이 흩어져 살면서도 통일국가를 이뤄가고 있는 게 뭔가 저력을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화산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럴수록 한켠에선 비자발급 지연으로 생긴 부정적 이미지와 막연한 불안감도 교차했다.

거리는 번듯한데 숙소는 조악

그래서 영월에서 국내 교육 중 강사들이 건넨 말의 의미를 곱새겨 보았다. “인도네시아, 그래도 좋아요.” 다른 파견대상국에 비해 좋다는 이야기인지, “한국인으로서 살기에 괜찮다”라는 뜻인지 언뜻 이해되지 않았지만 난 ‘그래도’를 희망의 불씨로 품었다. 1년이 더 지난 시점인 지금, 그 ‘그래도’란 의미의 퍼즐조각을 하나씩 찾아 흥미롭게 맞춰 보는 중이다.

▲ 자카르타에서 현지적응훈련 기간 중 통근(?)할 때 미니버스(사진 아래)를 이용했는데, 출퇴근시간엔 매연과 소매치기 때문에 자세가 이래야 했다.

작년 10월5일. 7시간 걸려 도착한 공항에는 동료 단원과 현지 사무소 직원을 합쳐 열댓 명이나 출영을 나와 줬다. 이들은 고맙게도 밤 11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지만 숙소까지 따라와 환영식을 치러 줬다.

여장을 푼 뒤 잠자리에 든 것은 밤 1시쯤. 푸근한 동료애 덕분에 다리뻗고 누웠으나 왠지 첫 밤의 상념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마치 속박이 과일상자를 마주한 듯 이중적 이미지가 오버랩돼서다. 수많은 고층빌딩과 자동차, 그리고 2층집 숙소의 번듯한 외양에서 받은 세련된 인상과 호감이 숙소 내부에 들어서면서 금세 밑으로 조정된 것이다. 전자가 “서울 뺨치네”였다면, 후자는 “알고보니 날림이구먼”이라고나 할까?

숙소는 고급주택가 안의 전셋집으로 단원들이 배치될 때마다 묵는 곳. 2개월 동안 자취할 집이다. 집안은 층고가 4m 가까운 데다 벽지가 없어서인지 휑한 느낌이었다. 내부 구조나 동선 또한 무척 낯설었다. 문짝, 침대, 옷장, 주방용품, 세면대와 욕조 등 조악한 내부 시설에 모기와 도마뱀, 엄지만한 바퀴벌레까지, 자취를 시작하면서 눈에 들어온 디테일이 참 실망스러웠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나중에 더러 당혹과 짜증을 수반하게 되는데, 하나하나가 얘깃거리다.

자카르타에서는 8주 간 있었다. 현지적응훈련 기간이다. 교육은 인도네시아어 학습 위주로 짜여졌지만 현지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과 임지 답사도 포함됐다. 숙소와 어학원, 코이카 인도네시아사무소를 오가며 교육받는 동안 스치는 풍경과 접하는 상황 모든 게 신기하고 이채로웠다. 이색풍물이 원래 매력, 아니 마력을 지닌건지 몰라도 낡은 버스나 노점상, 이슬람 사원, 거리를 메우는 오토바이 물결 등이 하나같이 작품사진감이었다.

한편으론 인니어 정상급 통역사인 어학원장 말마따나 뭔가 나라의 기틀이 허술해 보인 것도 사실이다. 정전이나 단수 등 도시 인프라의 바닥을 보고 느낀 거다. 그 어학원장은 20여 년 살면서 느낀 점을 “지도자와 교육시스템을 보면 미래가 없다”는 식으로 잘라 말했다.

▲ 어학 교육 중심의 적응훈련 수료식에서 코이카 인도네시아 사무소장(가운데)과 어학원 강사들, 동기 이우준씨(오른쪽에서 네번째)와 함께 했다.

자가용과 오토바이가 엉킨 자카르타 시내

인구 1천만 명이 넘는 국제도시 자카르타는 교통난으로 악명이 높다. 지하철이 없고 대중교통이 취약하다 보니 자가용과 오토바이가 엉켜 도로마다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도로를 걷다 보면 그 매연과 소음이 천지간을 가득 메울 정도다. 숙소와 어학원을 오가는 동안 미니버스를 이용했는데, 승하차 전후로 약 15분씩 땡볕 속에 걸어야 했다. 폐차 직전의 낡은 버스는 에어컨은 커녕 창문도 태반이 고정이다. 좁고 딱딱한 의자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3만 루피아 짜리(2,600원) 고급버스가 있지만 ‘착한’ 요금(5,000루피아,450원)이 어딘가?

어학원은 시원한 한국계 쇼핑몰 건물에 있어 좋았다. 식당가도 있어 점심을 해결하기에 맞춤했고 운동 삼아 다니는 윈도쇼핑 재미도 쏠쏠했다.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강사들한테 짧게는 하루 6시간씩 매일 인도네시아어를 배웠다. 밑천 다 떨어진 기억력 때문에 손이 고생했다. 휴대전화가 닳도록 사전 어플을 이용하다 보니 그 미세한 정전기에 손끝이 찌릿할 정도였다. 단어암기가 고통 그 자체였던 이유다.

1개월이 지나도 좀처럼 말이 늘지 않는다는 느낌에 좌절감이 움틀 무렵 혼자서 임지를 4박5일 다녀와야 했다. 근무할 기관과 도시환경을 둘러보고 살림집을 알아보기 위한 사전 답사다.

11월 9일 한낮에 도착한 반자르마신은 자카르타보다 더 덥다더니, 흡사 건식사우나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긴팔 정장을 입고 가야 했으니…. 마중 나온 교사 2명과 늦은 점심을 함께 했다. 제법 괜찮아 보인 식당이건만 선풍기조차 없는 걸 보고 놀랐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터, ‘추위보다야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오기를 발동시켰다.

이튿날 교실마다 돌며 학생들과 첫인사를 했는데, 외워온 인사말이 온전히 떠오르지 않아 진땀이 등을 적셨다. 살 집을 보러 다니면서도 의사소통은 고민거리였다. 현지어가 서툴러도 선생들과는 그나마 영어가 통했지만 저녁때 혼자 식당에 들어가 주문할 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가슴을 쳐야 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내게 보여준 정다운 미소는 위안이자 좌표가 됐다.

자카르타로 돌아오던 날 공항에서 사마린다를 다녀온 유일한 동기 이우준 씨(26)를 만났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자카르타에서 24시간을 같이해온 동지다. 잠자리, 식사, 수업, 외출 등 모든 일과를 함께 보냈으니, 단언컨대 집사람과도 이루지 못한 기록적 동거였다.

한국계 수퍼에서 사온 김치와 멸치볶음만으로도 충분했던, 그와 보낸 자취생활이 무려 51일. 자취와 언어에서 걸음마를 같이 시작한 동반자다 보니 인생관이나 추억담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뻘 되는 그였지만 세대차를 넘어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스산했다. 진짜 우리 아들과는 언제 그런 대화를 나눠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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