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화/ 오옥균 취재부장

▲ 오옥균 취재부장

1992년, 운전면허를 딴 이후 처음이다. 서울을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올라가다니…. 지난 11월 25일,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17번 국도를 타고 진천을 지날 즈음, 국도 아래 펼쳐진 고속도로 풍경은 그냥 주차장이다. 버스전용차선도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차들이 지나가고, 도통 움직일 줄 모르는 2·3차선은 하얀 눈이 쌓이고 있었다. 국도를 선택한 동행자의 판단에 박수를 쳤다. ‘일찍 도착하면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여유로운 상상도 했다.

소박한 꿈이 깨지는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기도에 진입하자, 국도도 별 수 없었다. 실시간 교통상황을 반영한다는 갖가지 종류의 내비게이션을 총동원해 조금이라도 빠른 길을 찾느라 차안은 분주했다. 그리고 내린 결정, 차를 버리는 것이었다. 양지를 거쳐 수원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지하철로 갈아탔다.

낮부터 눈이 내리던 흐린 하늘은 괜스레 우울함을 더하고 있었지만, 광장에 운집한 150만명의 얼굴에는 수고로움도 귀찮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내외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축제 분위기의 대한민국 집회는 유일한 자부심이다.

1980년대말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시위가 내심 좋았던 철없던 청소년이었다. 서원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올 때면 어김없이 최루가스가 모충동을 뒤덮었고, 서원대 아래 위치한 우리 학교는 종종 단축수업을 했다.

하교준비를 하라는 안내방송에 교실에서는 일제히 환호가 쏟아졌고, 가방을 정리하는 손은 빨라졌다. 한창 먹성 좋던 고등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분식점으로 향했다. 서원대 정문 옆 문구사를 겸한 분식점은 진작 문을 걸어 잠갔다. “데모를 왜 해? 장사 못한 건 누가 책임질겨?” 서둘러 학교를 빠져나가는 애꿎은 우리에게 큰 소리로 잔소리를 퍼붓던 분식점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결국 국밥집 대신 편의점을 택했다. 사실 일찍 도착했어도 식당은 언감생심이었다. 집회가 열리는 날 이 곳 식당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때 아닌 대목을 보는 것이다.

매출이 신통치 않던 차지만 마냥 반길 수도 없는 상인들의 마음은 가시방석이다. 마음은 문을 닫고 함께 소리치고 싶지만 모처럼 사람으로 가득 찬 식당 상황이 한편 기분 좋은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미안한 마음에 커피를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고, 핫팩을 내놓기도 한다. 광화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청주 성안길도 매한가지다.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모처럼 성안길에 사람이 넘쳐난다. 삼겹살거리에서는 이날에 한해 소주 한 병을 1000원에 제공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손님이 넘쳐나고, 수십만명의 국민이 매주 예정에 없던 서울행 차편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비로소 창조경제가 실현됐다는 비아냥이 나온다.

20여년전 누군가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던 집회가 모두에게 환영받는 집회로 변했다. 가게를 비우고 함께 거리로 나오지는 못해도 가게 문을 열고 행렬의 구호에 맞춰 ‘퇴진’을 외치는 상인들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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