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학면 장곡리 관란정에서 생육신 원호의 마음을 읽다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3)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제천은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추운 고장입니다. 남한강을 비롯한 하천을 따라 평야가 미미하게 발달하였으나, 충주댐 건설로 인해 그나마도 수몰되어 경작지가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춥고 척박한 데다 철도와 도로교통의 요충지라 사람이 몰리니, 주민들이 드세지는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제천 북쪽 끝 용두산 남쪽 기슭의 계천을 막아 이룬 의림지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주변의 농업용수를 감당하는 젖줄이 되어왔거니와 의림지 아래쪽 청전들[靑田洞]의 농사는 전적으로 이 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관란정.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원호의 충절을 기리는 문학 유적이다.

의림지 축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설이 전합니다만, 문헌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세종 때에 정인지가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며 고쳤고, 다시 세조 때 체찰사가 되어 호서·영남·관동의 병사 1500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시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도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5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지역의 중요한 수리시설이었던 만큼 부임하는 관장마다 수축하여 관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72년 대홍수로 서쪽 둑이 무너진 것을 이듬해에 복구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수리시설로 한몫을 하는 한편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상주 공갈못과 함께 원삼국시대의 농업기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물이 귀한 동네에서 의림지는 제천 시민들의 휴식처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비록 영동(嶺東)의 여러 호수보다는 못해도 또한 배를 띄워 놀이하기에는 족하다”고 하였거니와 잔잔한 저수지를 빙 둘러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둑에 늘어선 수령 400년을 자랑하는 노송들 사이로 영호정과 경호루 등 누각이 서 있어 풍취가 제법 볼 만합니다. 해빙기에 산란을 하러 이곳에 모이는 빙어도 유명한데,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 공어축제가 열립니다.

장락동의 석탑은 안녕하실까요? 영월과 단양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들판 건너 산자락을 바라보면 장락사가 있고, 거기에 7층 모전석탑(보물 제459호)이 호젓하게 서 있습니다. 전탑(塼塔)이란 흙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고 모전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을 말하는데, 이 탑은 회흑색 점판암을 절단하여 쌓아 올렸습니다.

높이 9.1m의 거구로 사찰의 크기를 짐작케 하는 이 석탑은 조탑 형식이나 재료의 가공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9세기경)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층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석주(石柱)를 세운 것이 다른 전탑이나 모전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라고 합니다.

상륜(上輪)은 모두 없어졌고, 7층 옥개(屋蓋) 윗면에서 꽃모양이 투각(透刻)된 청동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꼭대기에 청동제의 상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바람 속에서 수많은 불자들의 기원을 짊어지고 천 년을 견디는 동안 돌로 이룬 삭신이라도 건사하기가 만만했겠습니까. 오늘 노구(老軀)의 석탑은, 지치고 병들어 더 이상 자식들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 의림지는 주변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젖줄인 동시에 제천시민들의 유원지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장락동에서 영월 쪽으로 12㎞쯤 가다가 왼쪽 도로로 아세아시멘트 공장을 지나 영월 한반도면으로 이어지는 고갯길 중간에서 ‘관란정’이란 표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오솔길을 따라 300m쯤 올라가면 정자 하나가 벼랑 아래로 휘도는 서강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관란은 조선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원호의 호입니다. 원호는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에 돌아가 은거합니다. 이어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자 서강의 상류인 이곳에 대를 쌓고 어린 임금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며 조석으로 흐느끼며 문안했다죠. “간밤의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도다./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강물에 마음을 실어 보내던 충신에게 여울 물소리는 임금의 울음으로 들렸습니다. 급기야 단종이 목숨을 잃자 삼년상을 치르고, 세조의 부름에 불응하고 생을 마쳤습니다. 관란정은 이 같은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것입니다. 관란정 옆에 ‘조선충신관란선생유허비’가 서서 그 일편단심의 전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허비처럼 쓸쓸하게 서서 강물을 내려다봅니다. 무심한 강물이 사람의 마음을 다 전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보내는 이의 마음뿐이니, 청령포에 갇힌 어린 임금에게 가 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니 속절없습니다. 유자(儒者)들의 명분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그 순정한 속절없음이 마음을 흔듭니다.

서강에 띄운 마음은 동강을 만나고 남한강이 되어 한양의 궁궐에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300년이 지나고서야 정조대왕은 그 마음을 받고 그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여 보답했습니다. 관란정이 선 것은 그로부터 또 60년이 흐른 뒤입니다. 마음이 전해지는 데 필요한 시간이죠. 왕권이란 충심 위에서 흔들리는 촛불 같은 것, 그 자리에 앉아 끝내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임금의 마음 또한 속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댐을 막아 강물을 가둔 요즘이라면 그나마 물길에 마음을 실어 보낸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입니다. 물의 흐름이 더디니 언제 전해질지 알 수 없을 테니까요. 1985년 충주시와 동량면 사이의 남한강에 다목적댐을 완공하고 물을 가두기 시작하면서 충주뿐만 아니라 그 상류인 단양까지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이 당시 제원군의 남한강 일대였는데, 특히 청풍면의 경우 27개 마을 중에 25개 마을이 수몰되고 말았습니다.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다더니, 그야말로 상전벽해였죠.

충청북도를 흔히 ‘청풍명월의 고장’이라 하는데, 이 때 ‘청풍’은 바로 청풍면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청풍은 선사시대의 집자리 유적과 고인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고분군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곳이었고, 철도가 개설되어 제천읍이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기 전까지 제천 지역의 중심지로 문화유산이 많았던 곳입니다.

수몰민들은 정든 땅을 아주 버리지 못하고 높은 곳으로 옮겨 살기로 하였고, 이에 따라 1982년부터 3년에 걸쳐 청풍면 물태리 망월산성 기슭에 터를 닦아 물에 잠기게 된 문화재를 옮겨다 복원시켜 놓은 것이 곧 청풍문화재단지로, 제천을 찾는 이들이 꼭 들러 가는 유원지가 되었습니다. 날아갈 듯한 자태로 시인묵객을 불러들이던 한벽루, 석조여래입상 등 보물 2점을 비롯해 팔영루, 청풍향교 등 지방유형문화재와 각종 비석들이 이전되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도화리, 황석리, 후산리, 지곡리에서 옮겨온 옛집 네 채에는 수몰지구에서 모은 생활유물을 옛 풍속대로 꾸며 놓아 조상들의 살림살이를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집의 모양을 하였으되 집이 아니요 마을 모양을 하였으되 마을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온기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릴 적 살던 집을 그 물속에 빼앗기고 내준 친구 하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시인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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