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앞두고 파견 날짜·나라·지역·기관 여러 차례 변경돼 ‘당황’
‘대상 가려 봉사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인도네시아행 덤덤히 수용

안남영의 赤道일기
전 HCN충북방송 대표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 그가 위선적 섬김에 대해 일갈한 것이 있다. 그것은 ▶기분과 변덕에 좌우되는 섬김 ▶결과에만 관심을 갖는 섬김 ▶그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섬김 3가지. 코이카 영월교육원에서 교육받을 때 들은 이야기다. 참 고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유난히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머리에 쏙 들어왔다. 결과(언론보도)에만 관심 갖는 명사들의 ‘보여주기식 봉사’를 기자 시절 수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적이 없다” 말할 순 없지만…. 그보다 내게 마음자세를 잡아준 가르침은 세 번째다. ‘대상을 가려서 봉사를 하려 들면 못 쓴다’는 메시지일 텐데, 바로 공감했던 내용이거니와 막상 그런 일을 겪고 보니 그랬다.
 

▲ 작년 10월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 입국심사대를 빠져 나오면서 어줍은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인도네시아는 내가 처음 희망한 나라가 아니었다. 근무처도 당초 예정됐던 곳이 아니다 보니, 설렘과 기대가 다소 쪼그라든 상황에서 고맙게도 그 가르침이 내 심지를 굳게 해 주었다. 근무지가 열악할수록 ‘봉사만족도(보람)’가 더 크다는 코이카 선배들의 이야기는 덤이었다. 출국을 기다리던 작년 8~9월은 인도네시아에 대해 알아 보고 전해 들으면서 그 국가 이미지를 형성해간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이미지는 내게 자꾸만 ‘위선적 섬김’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를 떠 보았다. 그때마다 난 최 목사의 셋째 가르침으로 주문을 걸었다.

파견날짜 두 차례나 연기

해외봉사단 모집원서에 나는 파견 희망국가로 3개국을 써 냈다. 1순위 튀니지, 2순위 태국, 3순위 인도네시아다. 튀니지는 아랍어 말고도 프랑스어도 쓰기 때문에 택했다. 기본단어조차 가물거렸지만 불어 전공자로서 빨리 적응할까 해서다. 합격통지와 함께 배정된 나라는 운 좋게 튀니지였다―원하는 나라로 배정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테러가 발생하는 바람에 교육 들어가기 직전 인도네시아로 바뀌었다.

인도네시아는 동창이 3명이나 있는 곳이어서 어쩌면 반가운 나라다. 학창시절 세계지리를 배운 덕에 5개의 큰섬과 주요 도시 이름을 줄줄이 기억하고 있던 터라 그리 낯설지 않았지만 지원 당시의 설렘은 이미 반감되었다. 그래도 추운 나라로 재배정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이후 2차례나 파견 기관이 변경되면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입소할 때만 해도 내가 근무할 곳은 청주와 비슷한 규모인 반자르마신의 국립대로 정해져 있었다. 파견되면 우리말 가르치는 것 말고도 지역 대학과의 교류에 물꼬를 터 보겠다는 생각을 가져 보면서 나름대로 희망을 키웠다.

그런데 교육 수료 직전 파견 기관이 자카르타 남부의 국립 이슬람 대학교로 변경됐다. 교민이 많아 한국식 생활이 가능하다는데도 아쉬웠다. 물가와 교통난이 고통스럽다는 정보도 있고 해서 이를 피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겠지만, 수도에 있다면 도시 간 교류에 기여하겠단 생각은 접어야 할 것 같아서다.

교육이 끝날 무렵 출국일이 9월8일로 정해졌다. 수료 후 32일 만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출국일정이 그리 빨리 잡힌 것은 기록적이라고 했다. 비자발급 지연이 관행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예전엔 무려 6개월까지 기다렸던 단원도 있었단다. 엄연히 관용여권인데, 이해가 안 됐다. 국가에서 파견하는 봉사자의 입국 비자인데도 몇 달씩 끌다가 ‘마지못해’ 내 주는 모양새로 비친 일처리 말이다.
 

▲ 자카르타 공항에서 코이카 사무소 직원들과 단원들이 자정이 가까운 시각인데도 단 2명뿐인 우리 일행을 위해 출영 나와 줘 고마웠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출국도 임박한 시점에 9월21일로 연기됐다. 준비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 송별연을 열어 준 친구들로부터 ‘늑대소년’ 취급을 받는 일이 생겼다. 10월5일로 한 차례 더 연기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 이번엔 파견지역과 기관이 바뀌었다. 자카르타의 국립대에서 반자르마신의 기술고등학교로 말이다. 그 대학에서 근무했던 전임자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좀 당황스러웠다. 무슨 문제 때문인지 아무 설명도 들을 수 없었기에 답답했다. 하지만 그 변경 사유를 묻거나 언짢게 생각하는 순간 최 목사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셈이고 나의 해외봉사가 위선에 물들 것만 같아 담담히 받아들였다.

100여가지 목록 만들며 출국준비

출국준비는 크게 생활용품과 교육기자재 구비, 교육 콘텐츠 탐색·정리 중심으로 이뤄졌다. 더위와 햇볕에 대비한 옷가지의 종류와 수량을 정하는 것도 일거리였다. 문구류, 전자제품류, 주방용품류 등 100여 가지에 가까운 목록을 만들어 직접 사거나 인터넷쇼핑도 했다. 특히 갖고 갈 참고서적은 서울까지 가서 구매했다. 학생지도에 필요한 선물도 부피가 나가지 않는 품목으로 골라 수십 개씩 챙겼다. 교육콘텐츠는 지원서를 낸 뒤부터 염두에 두었던 건데, 한국의 인문지리와 문화를 알릴 만한 풍경사진을 직접 찍거나 구입했다.

외출할 때마다 도로, 교통수단, 식당, 병원, 들녘 등 닥치는 대로 찍었다. 각종 문화행사 등 사진을 청주시로부터 꽤 얻었다. 미지의 상황에 대비한 준비는 그럭저럭 설렘 속에 해 나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문득 소위 탐험가들의 도전정신이나 구한말 선교사들의 헌신이 떠올랐다. 목숨까지 내건 그들의 장도에 비하면 나의 해외봉사는 그저 환송조차 계면쩍을 따름이다. 어떤 비장함이나 위대함은 고사하고 현실도피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었을 법하니….

▲ 출국장을 빠져 나와 탑승교에 오르려니 문득 한국땅과의 이별이 아쉬워져 사진을 남겼다.

영월교육원에서 교육받을 때 파견국에 대해 연구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나의 발표 주제는 ‘재해백화점 인도네시아’였다. 2004년12월 26여만 명을 수장시킨 지진해일을 비롯해, 화산폭발, 홍수, 사이클론 등 자료를 조사하면서 측은지심이 생길 정도다. BRICS라는 신흥대국 반열에 올랐지만, 재해 대처에는 미숙해 외국의 기술지원과 협조에 의존하고 있다. 예방은커녕 피해상황 집계도 원활치 못하니 대책이 온전할 리가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순박하지만 몸이 불편한 땅부잣집 거인이라고 할까? 그래서 나의 인도네시아행은 구호활동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보람의 여정이 될 거라는 기대를 키워 갔다.

한데 막상 출국 지연을 겪고 보니 설렘과 열정이 좀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시간을 허공에 날린 기분이랄까? 그 이유가 급행료와 관련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귀띔을 듣고는, “그러면 그렇지”라며 무릎을 치는 심정이 착잡했다. 게다가 유독 인도네시아만 그렇단다. “앞으로 참아야 할 일이 많겠구나”라는 상념이 스몄다.

지금 생활 주변에서 다양하게 접하는 갖가지 ‘불편한 진실’은 이처럼 그때 이미 ‘비자’라는 복선을 통해 그 일각을 예고한 셈이다. 개선은커녕 올해 입국한 106기, 108기 단원의 경우 각각 1차례 연기 끝에 3개월 이상 기다려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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