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 물밀 듯 탱크를 몰고 파리에 입성한 것이 1940년 6월 22일이었고 연합군이 다시 파리를 탈환한 것이 1944년 8월 5일이니까 프랑스가 독일군의 군홧발에 짓밟혀 치욕을 당한 것은 정확히 4년 2개월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시 찾은 프랑스정부가 폐허 위에서 첫 번째로 착수한 일은 점령기간 동안 독일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민족 반역자들을 색출해 내는 일 이었습니다. 불과 몇 주만에 제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들이 전국에서 10만 명이나 검거됐습니다. 이들은 독일군에 붙어 동족을 괴롭힌 자 들이었고 그 가운데는 지식인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중 사형 선고된 사람은 6700여명이나 됐고 3만7000여명이 투옥됐으며 죄질이 가벼운 4만 여명이 공민권을 박탈당해 정상적인 활동이 금지됐습니다. 심지어 독일군에게 몸을 허락했던 여자들은 머리를 깎이고 옷을 찢긴 채 ‘독일 놈에게 몸을 팔았다’는 표지를 달고 거리를 끌려 다녔습니다. 그처럼 모든 부역자들은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책임을 추궁 당했고 응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와 같은 대 숙청은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건 민족 대청소였던 것입니다. 그런 일은 프랑스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벨기에는 5만 명, 네덜란드는 4만 명, 노르웨이는 2만 명을 나치 협력자로 가려내 사회로부터 추방했습니다. 오늘의 ‘위대한 프랑스’ ‘위대한 유럽’은 거기서부터 출발했다고 사가(史家)들은 적고 있습니다.
그러면 ‘식민지 35년’의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요?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제 민족의 피를 빨아먹던 매국노들은 그 얼마이고 동족을 고문하던 그 ‘인간짐승’ 들은 또 얼마였습니까? 그리고 해방이 된 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렀습니까?
1948년 정부수립직후 국회의 ‘반 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조사를 벌인 기간은 기껏8개월. 당초 조사대상 7000명에 발부된 영장은 고작 682건에 불과했고 그나마 실형7인, 집행유예5인, 공민권정지18인등 30인만이 제재를 받고 실형을 받은 7인도 다음해 모두 풀려나 친일파 숙청작업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이승만정부의 의도적인 견제 때문이었음은 물론입니다.
어디 그것뿐인가요. 정부수립과 함께 일제관리경력자 7만 명이 해방정부에 재 충원됐고 특히 경찰간부의 70%가 친일경력자였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독립운동가를 잡아다 고문하던 그 경찰이 독립된 나라의 경찰로 둔갑해 친일분자를 조사하는 진풍경을 연출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였습니까.
정부수립 초기 고급공무원 가운데 55.2%가 조선총독부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친일파 청산이라는 ‘첫 단추’는 잘못 끼워졌고 민족정기의 회복은 강 건너 갔던 것입니다.
친일파 청산문제가 ‘남의 일’이 된 것은 비단 이승만정부만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도,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그리고 김영삼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방된 지 57년, 정부수립 54년 만에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한 것은 뒤늦게나마 민족정기를 되찾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죽이나 못난 국민이었으면 그런 ‘청산’하나 제대로 못하고 반 백년을 넘겨 왔다니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숙청은 때가 늦었지만 청산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제나 이제나 잔존세력들의 저항이 결코 적지 않지만 이번만은 결코 용두사미가 돼서는 안된 다 는 것이 역사의 소명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3·1절을 맞았습니다. 모처럼의 연휴에 전국의 관광지가 붐볐다고 합니다. 83년 전 그 날 선조 들은 독립을 위해 피를 흘렸는데 오늘 우리세대는 노는 일에 정신이 없습니다.
누군가 말했다고 합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똑 같은 비극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요. 누가 이 말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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