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사회일수록 관료들의 레드테이프(서식주의)는 악명 높다. 구두보고로 끝낼 수 있는 사소한 일도 일일이 서류로 작성, 윗사람에게 보고-결제를 받느라 민원 하나 처리하는데 부지하세월이기 일쑤다. 그러니 애간장 타는 건 힘없는 민원인 뿐인데, 이때 소위 ‘급행료’란 기름질이 칠해지면 상황은 금새 달라진다.
그래서 혹자는 후진사회에서는 뇌물이 시민(민원인)과 관료를 연결하는 끈 역할을 함으로써 시장 메카니즘의 작동을 원활하게 해 준다고 강변까지 한다. 그러나 부패는 비용증가, 공정한 분배 및 경쟁의 방해, 신뢰붕괴 등 엄청난 ‘악의 근원’만 형성할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각종 게이트 부패 사건들로 시끄럽다 못해 악취가 진동할 정도다. 벤처육성에 나선다며 정치권과 행정부 등 권력기관들이 떡(지원자금)의 공정한 배분보다는 떡고물에 더 정신이 팔려 ‘더러운 짓거리’를 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 등의 명목으로 150조원이라는 무지막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과정도 정부의 준비소홀과 이해주체들의 도덕적 해이가 합쳐져 거대한 부패구조를 양산했음은 우리가 목도하는 바 그대로이다.
현 정권의 실정은 이 뿐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개혁으로 의약분업 교육개혁 등을 실패작으로 끝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실패 ‘판정’은 그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가운데 공공, 금융, 기업, 노동 등 4대 분야 개혁중 노동부문만 가장 성공(?)시키다 보니 고질적 실업-그것도 중하위층에게만 부담되는-만 초래했다는 블랙유머까지 나돈다.
그렇다고 현 정권이 잘못만 한 건 아니다. IMF직후 거덜난 외환을 안정시킨 것이나 급락한 GNP를 1만 달러대로 회복시킨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단돈 195억 달러의 긴급구제 금융을 받는 대가로 IMF로부터 일일이 경제통치를 받았던 것을 생각할 때 지금의 1000억 달러 외환보유고는 엄청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장선에서 기자는 현 정부가 잇딴 게이트 비리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며 역설적 ‘희망’을 읽는다. 특검이 수사과정에서 검찰과 국정원 등 막강 권력기관들의 구린 구석을 속속들이 들춰내는 것을 보는 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것들은 침묵의 베일에 가려져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게 뻔하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분명 보다 더 투명한 사회로 전진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올해는 선거의 해다.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지방선거, 대선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걱정인 것은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로 인해 경제에 주름살이 잔뜩 생기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경제계가 불투명한 정치자금의 제공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선언이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간 정치권과 경제계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나눠 온 ‘검은 돈’의 오랜 흐름을 끊겠다는 각오는 정말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지워진, 후대를 위한 막중한 역사적 의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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