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서에, 감정에, 느낌에 와 닿는 영화

애매한 팝콘
김규원 충북학연구소장

이 영화는 다 보고 나면 제목처럼 아무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여성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한국사회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회에서 수동적인, 乙, 인내, 부수적인, 감추어진 등등의 단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서 살아왔다.

최근에 양성평등을 주창하는 분들의 추구방법론이 많이 바뀌었지만 구호일변도와 일회성의 이벤트, 적대적 공격적 과시 등등으로 우호적인 세력들이 거부감을 갖도록 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 전혀 여성주의적 영화와는 안맞는듯 싶으나 최종적, 결론적,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는 꽤나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미학적 가치의 보편성, 영속성이라는 것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정서에, 감정에, 느낌에 와 닿는 영화다.

▲ 산이 울다 Mountain Cry, 2015년 제작 감독 래리 양 출연 랑예팅, 왕쯔이

영화 <산이 울다Mountain Cry>는 1984년 중국 타이항 안산핑이라는 산촌에서 시작한다. 낡고 오래되어 무척 남루해 보이는 부엌에서 아내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보잘 것 없는 음식재료로 조리를 하던 중 다리가 불편한 남편 혹은 남성 라홍에게서 강제로 성폭행 같은 섹스를 당한다. 말을 못하는 여인의 머리를 억지로 짓누르고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 집밖에는 열 살 가량의 여자 아이가 익숙한 무표정으로 갓난 아이 혹은 동생을 돌보고 있다. 산허리를 휘 감아 돌고 있는 수많은 계단식 밭을 보면 아마도 이 마을은 산촌이기는 해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으로 보이는데, 조금 전 커플과는 다른, 세련되고, 잘생기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 두 남녀의 사랑의 외침이 그 풍경을 넘나드는데, 마치 中高制 명창인 조동언류의 판소리 춘향전에서 향단이 방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하다.

두 주인공은 마을 최고 미모 돌싱녀와 조각미남 총각 한총(왕쯔이 분)인데 이들은 한총이 사냥에서 잡은 오소리 고기를 콘텐츠로 하여 서로 양보를 매개로 밀당을 하고 있는 듯 싶다. 異性간에 상대방이 제공하는 음식의 가치 혹은 가격이 비쌀수록 섹스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곧 발표될 예정이라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아무튼 동물성 단백질이 귀할 산간 마을에서 오소리 몇 마리만 더 선물하면 언감생심, 신체 일부의 교호를 통한 자극이 기대되는 상황인지라 한총은 일전에 설치해놓은 오소리 덫으로 급한 마음에 발길을 옮긴다. 비슷한 시각 남편 라홍 역시 산속으로 열매 채집을 하러 간다. 라홍은 평소 말이 없던 자신의 아이가 준 산과일과 같은 열매나무를 발견하고서는 기쁜 마음에 그 나무로 다가서다가 한총이 오소리를 잡기 위해 설치한 폭약덫, 일종의 지뢰가 폭발하고, 발목이 나가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아내에게 손도끼를 죽을힘을 다해 던지고는 정말 죽어버린다.

아무 할 말이 없게 되는 영화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멍청한 여편네’였다.(그 이유는 영화 末尾에 있음)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치르는 남편의 장례에서 아내의 표정이 묘하다. 마을에서 사고가 났다고 신고를 하면 연로함으로 오늘내일하는 촌장의 명예와 체면이 훼손될 듯하고 사고를 낸 한총의 구만리 앞날이 걱정되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대략 이 이전의 유사사례를 근거로 2만 위안으로 배상하고 사건을 유야무야 하는데, 이 여인, 말은 못하니 필담으로 돈 필요 없다고 안 받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혹시 돈이 부족해서? 아니면 복수를 원하는가? 라고 걱정하던 마을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합의를 보도록 유도하고 강요한다. 즉 사고를 낸 한총에게 여인과 두아이의 삼시세끼를 책임지우고 돈은 차차 갚으라는 식의 중재를 한다.

돌싱녀와 사랑을 진전시키지 못한 스트레스와 감옥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나와 소통이 안 되는 답답한 아버지 사이에서 한총은 어쩔 수 없이 말 못하는 여인이 필담으로 알려준 이름 홍시아(량예팅 분)와 두 아이를 하루 세 번, 따뜻한 식재료 공급을 이유로 그 집을 드나들며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문간방 발들이기를 통해 드디어 몸도 마음도 상호 만족할 만한 밀접한 수준에 이른다. 이러는 와중에 가끔씩 여인은 먼 하늘을 보듯이 마른 옥수수 밭에서도, 산에서도 몽상에 잠기면서 영화는 점점 위기와 클라이막스로 향하고 마침내 이 영화평에서는 말 못할 지경의 대단원을 제시하며 막을 내리니 영화관에서 확인하시기 바란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에 사용한 상품 대신 감정이라는 요소를 통해서 사랑을 분석하는데 이러한 감정조차도 사회제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여인이 처한 환경, 그리고 감정은 환경의 영향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속에 찾아온 사랑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한 진실을 밝히는 여인의 모습 그리고 오로지 눈빛으로 대화하고 동작으로 표현하는 랑예팅의 연기는 감히 <아가씨>의 김태리 수준이라고 하고 싶다.

더하여 주체적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만들어 간다는 점, 그리고 자신을 묶는 족쇄를 떨치려고 한 행동은 물론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등 스스로 여성의 주체성 확립을 이루는 과정과 결과는 슬프고도 아름답다. 꼭 문화권력자들의 음모를 람보식으로 분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이 좋은 영화는 아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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