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사의 전모를 파악한 전호근의 <한국철학사>

▲ 한국철학사 전호근 지음. 메멘토 펴냄.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권은숙 온갖문제연구실 연구노동자

식민지시대 일본학자들은 한국에는 고유한 철학이 없다고 했다.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유교·불교·도교가 모두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며, 삼국부터 고려까지는 불교에, 조선시대에는 유교에 집착하면서 중국에 맹종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지성계의 지적 패러다임이 중국의 지배이념에 따라 심하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어느 민족이건 자신이 발 붙인 땅의 고유한 자연조건과 현실 경험을 추상화하고 체계화한다. 개인의 해석과 사유가 시·공간을 공유하는 집단의 공감대를 얻으면 집단만의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만들고, 외래 사상을 받아 들여 독특한 철학사상을 구축하기도 한다. 철학의 생명은 ‘창조’에 있다. 강제로 주입된 사상은 외적 조건이 사라지면 힘을 잃게 마련이다. 외래 사상을 자신의 처지에 맞게 변화시켜 수용한 것을 비주체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해서 나는 일본 학자들의 언설에 동의하지 않으며, <한국철학사>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 책이 참 반갑다.

저자 전호근 씨를 장일순선생 22주기 추모식에서 만났다. 얼마 전 로마와 그리스를 다녀왔는데 너무 익숙해서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았다고 했다. 동양철학을 하는 자신이 이 정도라면 우리가 얼마나 서구화 되어있는가 뼈 속 깊이 반성해야 한다며 쓰게 웃었다.

<한국철학사>는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를 삼국, 고려, 조선(상)(하), 현대로 구분하고, 원효부터 장일순까지의 35명의 철학자를 다루고 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철학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군신화가 한민족의 기원을 묻는 철학적 질문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어서 왔는가’에 부합하지만,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철학과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신전에 쓰인 신탁으로 철학을 말하지 않으며,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파 되면서 비로소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 그 때부터 철학이 시작되는 것이다. 원숭이는 일이 끝나면 털 고르기를 하는데 인간은 ‘말’을 한다. 후일담이 철학이며, 다 지나간 다음에 하는 것이 철학이다. 문학은 재능이 있어야하고, 역사는 성실한 사람이 하고, 철학은 남들 다 버린 문제를 붙들고 뒤늦게 성찰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강단철학자 박종홍에 대한 새로운 발견

이 책 827페이지 두께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익숙한 사람들이 밤 마실을 나와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각자가 자기 생각을 가지면서도 타협점을 모색하고 결국에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라 설명하면서 성경의 포도원 이야기(마태복음 20장)를 덧붙인다. 나중에 온 일꾼에게도 똑같이 돈을 주는 포도원 주인에게 항의하는 먼저 온 일꾼에게 ‘비교를 넘어서야 화합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원효로 시작한 이야기는 현대에 이르러 철학자 ‘박치우’와 ‘신남철’을 소개한다. 낯선 이름이다. 빨갱이 철학자로 분류되어 연구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던 사람들이다. 신남철은 해방 후 1948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사망했고, 박치우는 1946년 월북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태백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토벌군에게 사살 되었다. 박치우는 강단을 떠나 총을 든 빨치산 철학자 였다. 저자는 두 사람을 포함시킨 이유가 1세대 철학자들의 사유를 살피지 않으면 한국 현대철학사 기술이 시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직접 행동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단철학자 박종홍에게 31페이지를 할애한다. 박종홍은 주희와 헤겔 철학에 집중하면서 산업자본주의, 부르주아 대의민주주의, 독일관념론을 바탕으로 ‘민족중흥’을 모색했던 인물이다. 5·16 구테타 이후 군사정부의 국가재건위최고위원회에 의원으로 협력했고, 독재정권의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맡았고, <국민교육헌장>의 작성자이기도 하다. 철학과 권력의 퇴행적 결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며, 삶과 철학이 분리될 수 있는가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인물이다.

나는 그가 ‘철학이 인간학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자연을 포괄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데에는 동의한다. 저자 역시 사상과 현실이 조화롭지 못한 철학자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 한 것이리라.

철학은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간다. 시대현실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철학이 할 일은 그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아닐까. 한국철학을 하는 이유는 과거 사상의 사회적 역할을 알고, 그 이해의 바탕에서 눈앞의 현실 문제를 풀 ‘창조적 힘’을 갖기 위함이 아닐까.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낯설게 성찰해 바른 방향으로 미래를 설계 할 수 있는 철학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국철학사>가 고민을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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