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래강 탐사

날 오라 해놓고
내 이름조차 모르는 당신!

그래도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산을 안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사름파리 돌무더기에 푸른 치마폭을 펴고.
꽃과 꿀을 준비 하였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가시를 세워 울타리가 되려 했습니다.

내 어린 것들을 무참히 베어 가도
당신을 위한 땔감이라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온 산을 다 점령 하겠다 욕을 하여도
난 결코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병든 나를 모른체하여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먼 고향의 새소리, 풀냄새가 하 그리워
잎이 짜 글어 노랗게 시들뿐입니다.

8월 10일.(화요일) 맑음 .
 지난 밤 12시와 새벽 2시에 물속 생명체들의 모습을 랜턴을 켜고 살펴보았다. 전에는 돌마다 까맣게 달라붙었던 올갱이(다슬기)가 몇 발을 옮겨야 겨우 한 마리씩 보이고, 이곳 역시 피라미가 많이 보이고 새코미구리. 돌고기. 동사리 등이 더러 보였다.

 투망을 던져보았는데 잡히는 것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래도 식지 않는 모래 바닥의 열기와 극성스런 모기 때문에 잠을 설쳤다.

 이화백이 아침 식사준비 하는 것을 보고 옥우 씨를 데리고 오니 10시가 다되었다. 차를 타고 청천면 후평리로 이동하였다.

지점5. 후영야영장 하류 양수장/맑음.

▲ 후영야영장 하류 전경 경중이와 정은이는 수질 검사를 하고 4명은 보트를 타고 탐사에 나섰는데, 바로 수심이 낮아져 배에서 내려 고성다리까지 2Km 정도 걸어서 살펴보았으나 수달의 배설물이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실잠자리/ 물잠자리/ 강도래/ 날도래/ 하루살이는 보였지만 물고기는 물이 흐려서 자세히 관찰 할 수 없었다. 한들보 지역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지점 6 괴산군 청천면 후영리 대후초교 앞 / 맑음 대후교 앞 도로와 다리 공사를 하여 회손 되고 노루목 마을 앞도 도로와 다리 공사로 회손 되었으나 그래도 상류 어느 지역보다도 아직 생태환경이 양호 하였다. 물고기를 관찰하려고 잠수를 하였지만 물이 흐려 볼 수 없었다. 박 교수와 만나서 강가에서 라면을 삶아 점심을 들었다.지점 7 괴산군 청천면 거봉리 거봉교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흐리고 소나기 ▲ 칠성댐 탐사 전경
  거봉교에서 차량3대를 주차하고 경중이는 차로 이동을 하고 6명이 배에 올랐다. 운교리 다리 상류까지 괴산댐 물이 차올랐다. 운교 다리 교각부근에서 잠수를 하였으나 물이 흐려 물고기를 볼 수가 없었다. 배를 타지 않고는 볼 수 없었던 탑 바위(괴산군 홍보책자에 나온다고 함) 등 비경이 펼쳐지는데 수달의 흔적은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수위의 차이가 심해서 그럴까?  물이 넓고 깊어서 먹이를 잡기가 어려워 살 수 없나? 확실치 않는 질문을 주고받았다. 얕은 곳에는 우렁이와 올갱이가 많았다.

▲ 칠성댐 탑바위 옥우 씨는 잠수를 하고, 따라서 배에서 내린 최 선생과 이화백은 호안을 탐사하고 박 교수와 내가 서툴게 배를 몰고 탐사를 하다 그만! 스크루에 그물이 감겼다. 그물을 떼어낼 칼이나 도구도 없는데 날은 어두워지고, 소나기는 들어오고, 인가도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외진 물위에서 핸드폰마저 불통이라 은근이 겁이 나기 시작 하는데 고깃배 두 척이 다가왔다. 반가우면서도 한편 그물을 찢은 것이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아무 말 않고 칼을 건네주었다. 그물을 찢어 미안하다고 하니 아무 말 없이 자기들이 그물을 제거 해주려 하였다. 칭칭 감긴 그물이 칼로 제거되지 않아, 자기네 공구를 가져다 스크루를 분해해서 그물을 제거 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곤욕을 치루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둠이 닥치는 소낙비 속에 버려뒀나 싶어 원망을…… 갈론 입구 선착장에서 소낙비를 맞으며 차에 배를 싣고 사람도 싣고 칠성면 외사리로 이동을 하였다. 공공건물이라도 빌려 보자거니, 아무리 경비가 넉넉지 않아도 이 빗속에 민박을 하여야 한 다 거니 실랑이를 하다가 처음 탐사에 참가한 사람도 있고 하여 민박을 하기로 하였다.다른이들에게 민박집을 찾아 보라하고, 경중 이와 나는 차를 가져오려 나섰다. 배로 가면 가까운 거리인데 쏟아지는 빗속에 외사리에서 칠성으로 나와 괴산, 문광, 덕평을 거처 거봉까지 오려니 한 시간은 걸리는 것 같았다. 옥우는 박 교수 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각자 차에 올라 외사리를 향하여 돌아섰다. ▲ 칠성댐 전경
 강한 비바람에 가로수 가지가 심하게 휘는데 아카시의 노란 단풍이 바람에 날린다.
상류부터 대부분 아카시 나무들이 잎이 누렇게 떡잎이 되어 떨어지고 고사목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박 교수에게 물어보니 혹 파리로 인한 피해 때문이라고 하였다.

 양봉을 하는 이들이 꿀 농사를 망쳤다 하여도 귓가로 들었더니 한 이년 전부터 발병이 되었다고 한다. 언제는 사방사업용으로, 땔감으로, 밀원식물로 좋다고 외국에서 들여와서 잘 써먹을 일은 생각 않고 이제는 외래종이 온 산을 다 잡아 먹겠다고 불평을 하였는데……

 처음 프랑스에 가서 TGV 열차를 타고 밤에 파리 역에 내리는 순간 수많은 인파를 보고 깜작 놀랐었다. 이곳이 유럽이고 프랑스고 파리인가?  당연히 백인들이 살 거란 내 좁은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흑인, 아랍인, 유태인, 동양인, 그리고 백인.  형형색색의 차림과 피부색.
프랑스의 출산율이 자꾸만 줄어든다고 하더니……
 
 이웃나라 독일도 게르만 민족이 자꾸만 줄어든다고 하였다.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도 많이 낳기 싫어하고, 하나도 안 낳는 사람이 늘어가고 우리 고아들은 외국으로 보내면서도 남에 자식은 안 키우려하고 하지 않는가. 

 아카시를 누가 가져 왔나?
황소개구리, 부르길, 베스를 외래종이라 미워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프랑스가 백인들만의 땅이 아니 듯, 우리의 산에 조선소나무만 살수 없듯,  이제 우리나라가  한민족만의 삶터가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하며 외사리로 돌아왔다.

 지친 몸을 부추기며 늦은 저녁을 지어먹고 민박집 창 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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