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와의 대담집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새상을 지배하는가’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김상수 충북재활원장

 

▲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노암 촘스키 외 지음. 강주헌 옮김. 시대의 창 펴냄.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존재론적 자각이 없는 개인은 자신과 삶에 대한 인식을 저명함과 힘의 논리에 의거합니다. 노암 촘스키는 권력화한 지식인은 대중으로 하여금 일사분란하게 길들여지도록 동의조작을 하며, 저명한 지식인이나 연구소가 곧 올바른 지식인은 아니지만 대중은 그들의 저명함을 곧 확고한 지식체계로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노암 촘스키는 닦여진 길을 마다하는, 아니 길 자체를 의심합니다. 소위 세계적 명문대 교수를 간판으로 가진 지식인이며, 독립된 학문기관(institute professor)으로 인정받는 권위자입니다. 그가 말하는 세계화란 미국식 모델을 전 지구에 심기 위한 조작된 시장법칙입니다.

자본은 이미 인간을 인격권의 주체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오직 노동력을 파는 시장가치의 단위로 환산할 뿐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진화한 자본은 이제 노동력조차 불필요한 투기성 자본이 되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듭니다. 거대 자본의 본질에 대해 경고를 멈추지 않았던 촘스키의 예견대로 이 나라에서도 다국적 자본과 부패한 정치권력의 결탁이 국가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대중들의 몫으로 돌아옵니다.

세계 권력의 중심은 최강대국들이며, 힘의 핵심은 그들 국가로부터 보호받으며 성장한 다국적 기업과 금융기업, 국제기관들입니다. 세계은행(IBRD)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은 긴밀한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들어, 강대국과 단체의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거대 권력화한 그들의 정책과 자본에, 대놓고 저항할 수 있는 국가는 없습니다. 그것은 강대국이 편성한 세계질서로부터의 퇴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거대 자본권력의 국가에서 시작된 민간기업의 아웃소싱(outsourcing)은 자본의 이익을 창출하는 대표적인 경영방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방만한 운영 지양과 이익 창출을 내세워 국영기업까지 아웃소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하지 않고 버젓이 밀입국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공항 민영화를 주장하던 당시에 알려졌던 것처럼 85%가 용역업체 노동자에 의해 가동되고 있는 현실이 다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자본의 이익과 효율성만으로 가치 평가된 국가의 안전과 공익에 대해, 책임주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패한 정치권력은 민영화의 중요성을 선전합니다.

이게 최선입니까?

촘스키는 능동적인 기층(基層)세력에 의한 저항운동과 여론의 압력만이 숨은 지배자들의 정책을 유보시키고, 다국적기업의 횡포를 멈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위기감을 조성하여 정치적 술수로 이용하는 우익과 대중을 기만하는 미디어의 선전술, 교육을 통해 정당화되는 지배구조와 계급구조, 법정의 독립을 감시하고 저항하기 위해서는 민중 교육과 깨어있는 조직만이 거대 권력을 압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책이 번역된 당시보다 거대 자본의 지배가 초래한 양극화와 언론의 기만적 행태는 심각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미 동의조작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독립적 가치로 지켜내는 존재양식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년세대의 높은 실업률과 노년세대의 빈곤만으로도 벼랑으로 내몰린 삶의 심각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 세상을 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명쾌합니다. 각자 삶의 지배자는 자신이어야 하고, 깨어있는 개인이 모인 사회의 지배자는 다수 시민의 각성이 원천의 힘이 되어야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주도권을 놓쳤을 때, 자신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자신만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주인으로서의 삶을 상실토록 종용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를 기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근원의 진실과 진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근본으로 돌아가는 힘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지혜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향하는 물음 ‘이게 최선입니까?’가 필요하며, 그 대답은 오직 깨어있는 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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