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김수정 젠더사회문화연구소‘이음’소장

▲ 김수정 젠더사회문화연구소‘이음’소장

“여자들은 아마도 남자가 강간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결혼도 못하고, 성에 대한 쾌락도 몰랐을걸요.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도 필요악일 수 있어요.” 내가 가르치는 수업시간에 50대 후반의 남학생은 당연한 듯이 발언했다.

“남자 어르신들이 있는데 감히 여자가 무슨 발표를 해요. 이런 건 다 남자 어르신들이 해야죠.” 노인복지관에서 강의를 할 때 조별토론 후 한 할머니는 발표를 하겠다는 다른 할머니를 제치고 서열을 일순 정리했다.

“남녀평등 정말 잘 이루어지고 있지요. 옛날 생각해봐요. 지금 여자들이 얼마나 좋아졌나. 오히려 남자에 대한 차별, 역차별이 문제예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성평등의 이해’란 강의를 하던 중 여성공무원이 발언한 내용이다.

“저도 대학시절 양성평등을 배울 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남편 월급을 받아 살림해보니 남편한테는 좀 꿀리지만 살기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 되면 굳이 평등을 주장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박사과정을 하는 후배는 성 평등에 대한 자신의 모순된 감정을 토로했다.

거슬러보면 2~30대 시절의 나는 사내들과 연애를 한답시고 돈가스 1인분으로 모자라는 위를 움켜쥐고 반을 남기는 ‘여성다움’을 흉내 냈다. 남녀가 뒤섞인 술자리에서는 섹시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으로 콧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기도 했던 것 같다.

남녀가 어울리는 자리가 되면 본성과 달리 이중적인 언어와 태도를 보이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던 것을 보면 그동안 사회적 관습이 강제했던 ‘여성다움’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성폭력을 통해서라도 여성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한 남성의 주장도, 남자만이 사회의 어르신으로 발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할머니도, 성 평등은 이미 ‘실현’되었고, 역차별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여성공무원도, 중산층의 안온한 늪에서 남편의 월급으로 사는 것이 좋다는 후배의 고백도 그들이 가진 가치관에서는 ‘당연히’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자기 질문과 학습, 그리고 성찰을 통해 새로운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지금 옳다고 믿었던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 있으며 짧은 식견에서 나온 오만일지도 모른다. 계급사회였던 시절의 가치관을 현재에 적용해 설명해 낸다면 그것은 객관성을 잃는다. ‘집안의 부엌데기’였던 시절의 여성보다 지금의 여성이 훨씬 해방되고 권리를 찾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래서 이제는 성 평등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재를 살고 미래를 꿈꾸는 것이지, 과거의 불합리한 제도와 가치를 들추어 현재를 위안 받고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을 통해서 여자가 쾌락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그것은 남자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지배자의 삶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 평등한 사회는 저마다의 삶이 존중받는 주체로서 모두에게 선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천부인권은 남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 여성뿐 아니라 모든 소수자에게 당연한 권리이다.

성 평등에 대한 담론 또한 이제까지 당연시 하며 누렸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에 분노하는 부류가 있을 수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보호받고 뒤로 물러서 삶을 주체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금의 평등논의는 불편할 수 있다. 삶에 있어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껍질을 벗어야 하는 아픔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라는 존엄함에는 언제나 역설이 존재한다. 난장판 같은 끝없는 가치의 충돌을 통해야 우리는 비로소 한걸음 나아간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지 않던가.

결국 성 평등이라고 하는 절대적 진리는 세상을 전쟁판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이것이 남녀의 전쟁이라고 오해한다. 아니다. 그것은 큰소리치던 자와 눈치보고 숨죽이며 자신을 주장할 수 없었던 자들의 당연한 갈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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