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한 편의 소설’ …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연규상 (주)열린기획 대표

얼마 전 네이버캐스트 ‘지식인의 서재’를 훑어보다가 소설가 심상대 편에서 충격을 받았다. 심상대가 추천한 책은 전부 소설이었다. 작심한 듯 55권의 추천도서를 소설로만 채운 심상대에게 한 소설가의 결기마저 느껴졌다.

그에게 서재란 유배지란다. 그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한 탱자나무가 곧 서가인 셈이니 모르긴 해도 죄목은 아마 소설가의 운명이 아닌가 짐작했다. 그런 생각의 끄트머리에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달에 울다>가 떠올랐다.

등단 후 5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하며 오직 소설 창작을 위해 문단과의 교류도 끊고 구도자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킨 소설가. 문장 하나하나에 혼을 채워 넣는 장인정신으로 자신의 몸과 문학을 일체화한 작가. 생각이 심상대의 추천도서에서 마루야마 겐지로 번진 것은, 필시 ‘문학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내게 그들의 날선 소설 정신이 죽비가 된 탓이리라.

<달에 울다>는 주인공의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 내면 세계를 탐미적으로 그려낸 ‘시(詩)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40년 동안 사과밭을 경작하며 한평생 고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열 살 무렵에,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촌장집 곳간의 쌀을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이웃사람을 살해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한다. 20대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주동이 되어 죽인 이웃 아저씨의 외동딸인 야에코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3년의 짧은 사랑 끝에 야에코의 남성 편력이 시작되면서 주인공은 실연을 겪는다. 주인공이 서른이 되었을 때, 야에코는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와 함께 고향을 떠난다. 야에코는 주인공이 마흔살이 되던 해의 어느 추운 겨울날 마을로 돌아오지만, 주인공을 만나지 못한 채 그녀의 빈집 앞마당에서 동사(凍死)한다.

현실과 환상이 빚어낸 소설의 비경

소설은 칼로 벼린 듯한 단문으로 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의 광기, 사랑과 실연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신화적 공간으로 흩어버린다. 현실과 환상을 이어주는 매개는 주인공의 방에는 놓인 병풍이다. 거기에는 달이 떠있고 비파를 타는 법사가 그려져 있다. 병풍과 법사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주인공의 내면과 사건의 이면을 드러낸다. 열 살부터 스물, 서른을 거쳐 마흔살이 된 지금까지의 삶이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으로 겹쳐지는 구성이 절묘하다.

주인공의 심리에 따라 병풍 속 달빛과 계절과 풍경이 바뀌고, 눈 먼 법사의 외침이나 연주하는 비파소리가 달라지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특히 주인공이 병풍 속 산기슭 어디엔가 있으리라고 염원하는 ‘사과나무 골짜기’에 대한 상상력이나 미지의 힘이 깃들어 있는 ‘생선껍질 옷’ 같은 기이한 상징은 마루야마 겐지 소설 미학의 한 정점이다.

“언젠가 가장 아끼는 문장을 제시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나는 이 세상에는 ‘불의 문장’과 ‘물의 문장’이 있다고 전제한 뒤에 청년 마르크스의 <헤겔법철학 비판 서설>과 마루야마 겐지의 이 소설(그중에서도 82~3쪽)을 내밀었다. 전자를 읽으면 정신이 타고, 후자를 읽으면 영혼이 젖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애초에 이 소설을 읽게된 건 평론가 신형철의 이 단평에 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은 단평의 황홀함 그 이상이었다.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에서 김훈을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주류적 생각에 대한 경멸을 독창적인 문체 미학으로 이끄는 마루야마 겐지나 ‘사실만을 가지런히 챙기’면서도 어느 순간 매혹적인 심미성으로 끌어올리는 김훈의 문체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두 작가는 관념보다는 몸의 감각을 중시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김훈이 연필과 지우개만으로 칼과 현과 자전거의 생태학을 갈파할 때, 그 중심적 사유는 몸이듯, 마루야마 겐지가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에서 반복해 말하는 것도 소설을 위한 몸 만들기이다.

마루야마 겐지를 질투할 이유야 많지만, 그중 제일은 게으른 문학 애호가들에게 날리는 강력한 ‘한 방’이다. 책에 길이 없다는 둥, 소설은 오죽하겠냐는 둥 하는 약해빠진 생각을 일거에 때려눕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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