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에 묻혀 있어야할 부장품, 국립중앙박물관 유입·전시돼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1536~1593년)의 묘소에 묻혀 있어야할 ‘묘지석’이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유입경로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묘지석(墓誌石)은 지석(誌石) 또는 묘지명(墓誌銘)이라 불리며 죽은이의 이름과 신분, 생존 연월일, 생전의 행적과 묘소의 소재를 적어 관과 함께 땅속에 묻히는 일종의 금석문이다.

▲ 1665년(현종 6년) 3월 우암 송시열의 택지로 조성된 송강 묘소는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송강사 남쪽 1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1996년 1월 충북도기념물 제106호로 지정.

묘지석은 묘 앞에 세우는 묘비석과 구별되며, 형태는 네모난 것을 기본으로 원형, 기둥형, 대접형, 항아리형, 위패형 등 다양하다.

따라서 묘지석은 묘를 파보기 전까지 그 실재를 확인할 수 없어 도굴유무를 가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 송강 정철의 묘소에 있어야할 묘지석이 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철의 묘지석에 얽힌 이야기에 대해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정철의 묘지석 제작부터 중앙박물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송강 정철은 1593년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승정촌에서 향년 58세로 별세했다. 이후 정철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모셔졌던 것을 1665년(현종 6년) 우암 송시열의 택지에 따라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지장산)로 이장했다.

송시열은 인근에 송강사(松江祠)를 건립했으며, 1978년 중건한 것으로 기록됐다. 정철의 묘가 진천으로 옮겨올 때 묘표, 신도비, 묘지명 등은 모두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묘지석은 정철의 손자인 정양(1600~1668년)이 구워서 만들었다. 정양(鄭瀁)이 처음 묘지를 구울때만 해도 정철의 시호가 내려지지 않았다. 1684년(숙종 10년)에 정철이 문청(文淸)의 시호를 받으면서 내용을 추가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송시열이 지은 묘지명 뒤에 ‘무진추기’라 명명해 김수항(金壽恒)의 주도로 이루어진 ‘문청’사시 내용을 무진년인 1688년 추가했다. 하지만 관과 함께 묻히지 못하면서 묘지 10여편이 파손되기에 이른다. 이후 정양의 손자인 정진(鄭津)이 1706년(숙종 32년) 영동 현감으로 있으면서 ‘무진추기’ 뒤에 다시 묘지석을 굽게 된 사연을 추가해 23편의 묘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

 

후손 영동현감 재직시 23편 묘지 제작

하지만 이 23편의 묘지석도 관과 함께 묘지 내에 묻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철의 30대손인 정훈택씨(영일 정씨 문청공파 중앙종친회장, 74세)는 “50여년 전 집안 어른들이 묘소를 개사초하는데 봉분 둘레에서 묘지석이 출토되어 다시 예전대로 묻고 사초를 했다”면서 “묘지 내에 있어야할 지석이 봉분 둘레에 이장된 것이 의문스럽다고 대화하는 것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 송강 정철의 ‘정철 자묘지’

또 “당시 지문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으로 생각되며 묘소를 고양 신원에서 이곳으로 이장 당시 지석을 납관한 것이 아니라 추후에 제작하면서 묘소 둘레에 묻은 것인데 사초 당시 지석이 출토되었다는 소문을 도굴꾼들이 전해 듣고 도굴해가 현재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정철의 후손들이 묘지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지난 2008년이다. 2008년 9월 국립 청주박물관은 진천지역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기 위한 ‘생거진천’ 특별전을 개최했고 이 특별전에 정철의 묘지석을 전시했다.

정씨는 “2008년 가을 종친 등으로부터 송강의 묘지석이 청주박물관에 전시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묘지석은 관과 함께 무덤에 묻혀 있는데 밖으로 나와 박물관에 전시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묘지석은 예서장법에 하관 후 하지석이라 하였는데 송강의 묘소가 현존하고 있는데 박물관에 전시됐다는 것은 믿을 수 없고 지석의 명문은 족보나 문집에 등재돼 있지 않아 기록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씨는 같은 해 11월경 이월면 노원영당 제향에 참석했다가 군청 문화체육과 관계자로부터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송강 묘지석의 청주박물관 전시에 대해 이야기 들으면서 의문이 증폭됐다.

 

경찰, 중앙박물관 소유 경위 조사중

정씨는 송강의 묘지석에 대한 진위여부 확인에 나서 중앙박물관에 전문을 요청했고 박물관은 전문 내용이 기록된 마이크로필름을 보내 주었으며, 이를 해석했다는 것이다.

마이크로 필름을 해석한 정씨는 “이 유물이 송강의 묘지석임을 확신했고 박물관 측에 입수 경로에 대해 질의했으나 어떠한 답변도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에대해 정씨는 “땅 속에 있어야할 묘지석이 박물관에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며, 선조 묘지를 보호하는데 소홀히 한 죄를 통감한다”고 말했다.

이후 정씨는 “지난해 5, 6월경 대전광역수사대로부터 묘지석 도굴에 대한 참고인 진술이 필요하다고 해 출석했더니 장물마비 판매목록에 송강의 묘지석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정씨는 “지난해 경찰에서 묘지석의 도굴경위와 유통경로를 수사한 것으로 알고 있고 장물아비도 검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제 와서 송강의 묘지석에 대해 관심이 증폭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번 기회에 개인 문중의 유물임이 확인된 만큼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송강의 묘지석을 되돌려 받기 위한 법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박물관이 이 묘지석을 소장한 시기는 2000년 경으로 알려졌다. 26.5㎝×18㎝의 납작한 사각형 도자기 23편으로 이뤄진 이 묘지석은 ‘정철자묘지(鄭澈磁墓誌)’라는 이름이 붙여 있고 ‘신수(新收)-015769-000’이라는 중앙박물관 소장번호도 매겨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최근 이 묘지석의 도굴 여부와 중앙박물관까지 흘러들어 가게 된 경위를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골동품 장물아비가 검거됐는데 판매 목록에 이 묘지석이 포함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경찰은 누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도굴했는지 암거래를 통해 어떤 경로를 통해 중앙박물관까지 들어갔는지 등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결과 이 묘지석이 도굴된 게 드러날 경우 중앙박물관 소유에서 영일정씨 문청공파 종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전망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