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퍼니 스탈의 페미니즘 수업 청강기 <빨래하는 페미니즘>

김수정
성공회대 NGO 대학원 실천여성학과 재학 

지난 1월 중순 석사학위 논문을 끝내면서 나의 여성학 수업은 끝을 맺었다. 2년 동안 서울을 오르내리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키우던 시절은 그야말로 끝났다. 내가 ‘여성이어서’ 스스로 딜레마에 처해야 했던 상황에 대해 해답을 찾고자 한 학문의 여정은 더 많은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나는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성폭력에 관한 뉴스를 들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여성해방이 되었다는 언설을 내 뱉는다. 전자제품의 일상화와 여성의 눈부신 학력과 취업은 어쩌면 가시적으로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부의 눈치 빠른 여성들은 필요할 때만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나 편협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우리를 글로벌시민으로 격상시킨 듯하다. 그 이면에 얽혀있는 여성, 계급, 인종, 문화로 중첩되어 있는 복잡한 상황을 자본주의는 교묘한 술책으로 개인이 자유롭게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며, 많은 것을 탈정치화하고 있다.

여기 90년대에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던 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스테퍼니 스탈, 미국여성으로 뉴욕의 명문여대 바너드대를 졸업하고 출판사 저작권 담당자로 일하다 신문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동거하던 남자친구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결혼과 출산, 양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여성의 삶으로 자신이 인지할 틈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 제목: 빨래하는 페미니즘 지은이: 스테퍼니 스탈 옮긴이: 고빛샘 출판사: 민음사
책 <빨래하는 페미니즘>(원제 'Reading Women')은 2년에 걸친 저자의 페미니즘 수업 청강기다. 자신이 공부했던 90년의 여성학 수업을 음미하면서 현재를 재해석하는 과정은 경험이 제대로 녹아있어 부담없이 읽힌다. 젊은 친구와의 교감 속에서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드러낸다. 1·2세대 페미니즘과 포스트 페미니즘의 주요 저서들을 등장시켜 다시 읽어내는 서평은 어렵다는 여성학에 대한 편견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학> 등의 서평은 현대여성의 의식과 전통여성의 생활 사이에서 질곡을 느끼는 우리의 경험과 다르지 않게 저자의 일상과 버무려져 쉽게 다가온다.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청강생이 된 저자

20년 뒤. 후배들 페미니즘 수업의 청강생이 된 저자는 20대 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울스턴크래프트를 다시 본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의 유럽은 ‘아내와 어머니가 될 운명인 여자들에게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믿음이 만연하던 때’였다고 한다. 그녀는 그 시대에 맞서 남성과 여성 독자 모두를 납득시키고자 결혼과 육아에 대해 얘기하면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설파했다.

‘여성주의’는 시대의 맥락과 더불어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에둘러 “현명한 남자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진짜 목적인 여성교육을 주장해야만 했던 울스턴크래프트의 고뇌는 21세기에도 유효하다.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탈색되고 윤색된 여성주의를 전파해야하는 여성운동가들의 고뇌는 누군가에게는 ‘당신들만의 여성주의’로, 누군가에게는 ‘현실성 없는 여성운동’으로 비춰지는 악순환을 낳기 때문이다.

성 평등을 주장하면서 여성의 차별만을 주장하는 여성주의는 물론 편협하다. 소수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여성주의는 그래서 실천학문이다.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성찰의 학문이다.

저자는 과거의 페미니즘을 오늘의 페미니즘으로 세탁하면서 자신에게 속삭인다. “그녀가 나이며 내가 그녀다. 우리는 함께 다른 인생이 만들어놓은 지도를 참조해 우리의 발자국을 앞뒤로 더듬으며 현재의 우리를 만들 것이다. 여기,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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