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재발견에 대해 다룬 알랭 바디우 등의 <인민이란 무엇인가>

이종수
시인·청주 흥덕문화의 집 관장

인민이 기존의 권력을 부수고 나올 때, 그들은 인민 의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높아져가는 불안정성과 대면하면서 살아볼 만한 삶의 지속가능한 조건을 확립하는 투쟁에 합류하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다.

새로운 인민, 결국은 그런 집단을 함께 묶어줄 것들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특정한 요구사항, 삶의 불가능과 불의를 느꼈던 사람들,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음으로써 변화가 불평등을 지속시키고 확대하는 것에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료가 되어야 한다. 전지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다수 인구에게 불안정성의 조건을 가중시키는 것에 저항함으로써 민주화 과정과 대중 운동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적인 통제와 안보 차원의 통제 형태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우리 인민-집회의 자유에 관한 생각들’이란 글에서 한 말이다. 거리로 몰려나오는 사람들과 온라인에 모여드는 사람들, 감옥에서처럼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연대의 네트워크까지 언어, 행동, 제스처, 움직임을 통해 서로 팔짱을 끼고, 움직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몸이 생존하는 가치를 실현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서로를 위해 서로와 더불어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한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를 시작으로 정윤회 게이트를 놓고 보더라도 민주주의와 그것을 이루는 주체인 ‘인민’의 저항과 아울러 변화하지 자본과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지워져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실감있게 다가온다.

인민 복원을 위한 통찰 필요한 때

▲ 제목: 인민이란 무엇인가 지은이: 알랭 바디우 외 옮긴이: 서용순,임옥희,주형일 출판사: 현실문화

<인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인민(요즘 종북, 좌빨로 선동하는 입장에서 보면 불순해 보이겠지만)이라는 말이 통제 당하고 질서 유지에 봉사하기 위한 개념으로 변화하고 무기력한 인민으로 남는 때에 맞춰 권력과 규정, 제한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인민’의 재발견을 다루고 있다. 알랭 바디우의 ‘인민’이라는 말의 쓰임새에 대한 스물네 개의 노트, 피에르 부르디외의 ‘인민적’이라고 말했나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감각할 수 있게 만들기’, 사드리 키아리의 ‘인민과 제3의 인민’, 자크 랑시에르의 ‘찾을 수 없는 포퓰리즘’까지 총 여섯 개의 글을 싣고 있다.

서두에 알랭 바디우가 “국가란 우리가 창조하고자 열망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가이거나 우리가 사라지기를 열망하는 공인된 국가이다.” 라고 했듯이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화두가 되어버린 시국이기에 뼈저리게 다가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선거조차 위임하고 만 속 빈 권리에 지나지 않듯이 국가권력과 자본의 공고한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현실에 시의적절한 물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국민(알랭 바디우는 봉인되고 무기력한 전체일 뿐이라고 했다)이란 말은 이제 국가가 인정하는 해롭지 않은 개념이 된 지 오래다. 선거를 통해 권력과 자본을 용인하게 되는 무기력한 인민이 아닌, 니체가 말했듯이 권력에의 의지를 다시 찾는, 몸이 존재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저항해야 하는 새로운 인민으로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포퓰리즘’ 차원에서 의회민주주의가 새로운 전체주의로 몰고 갈 위험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제 민주주의는 다시 씌여져야 할 때이다. 주체인 ‘인민’이 사라져버린 민주주의에서 ‘인민’의 복원을 위한 통찰이 필요한 때이다. 여섯 명의 사상가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인민으로 자각하지 못하게 하고 끝내 해방되지 못한 채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가고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고 실천하게 하는 통찰의 기록인 셈이다. 서용순의 해제와 함께 읽어보면서 ‘민주주의’를 살리고, ‘인민’을 구해내는 저항에 동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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