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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잊지 말자. 그 이름 친일

상당산성 ‘조선신탁주식회사’ 토지는 사실상 민영휘 것 장남 민형식 “민형위 재산 불법한 재산 많아 타인명의로 취득” 재산조사위 민영휘 본인명의로 취득한 재산만 조사 국고환수 조사 자체도 안돼

⓷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어떻게 피했나?

2020. 02. 02 by 김남균 기자

2007년 8월 13일,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휘 후손들의 소유한 토지 일부에 대한 환수 결정을 하면서 이렇게 발표했다.

친일재산 조사위원회는 약 1년간의 조사활동을 전개 민영휘가 후손들에게 남긴 재산 중 31만7362㎡의 토지를 환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의미있는 성과였지만 완성형은 아니었다.

“향후 민영휘 후손 명의로 사정받은 토지 등도 추적하여, 친일 재산 여부를 가려 국가 귀속 할 예정임”이라는 발표처럼 미완의 환수였다.

 

미제로 남은 재산환수, 그리고 친일파 후손의 묘

 

그렇다면 2007년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귀속결정을 한 토지는 어떤 것일까? 대부분 민영휘 본인 명의로 사정된 토지가 대부분이다. 반면 민영휘 본인 명의가 아닌 후손들의 명의로 사정된 토지들은 일부만 포함됐다.

여기서 사정(査定)이란 토지등의 소유관계를 조사해 토지등기부 등본 등에 대하여 기록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본보가 입수한 결정문을 살펴본 결과 국가귀속결정이 난 토지는 대부분 민영휘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가 된 토지였다.

민영휘 후손이 소유한 토지 중 제일 먼저 국가귀속 결정이 나온 청주시 상당구 산성도 소재 562㎡의 밭과 397㎡의 임야의 경우 최초 소유자는 민영휘였다.

이 토지는 민영휘가 1912년 11월 15일 토지등기부에 사정받았다. 그러다가 1931년 2월 28일 그의 첩 안유풍의 명의로 등기를 이전했다. 1935년 9월에는 다시 조선신탁주식회사명의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소유권 이전사유는 ‘신탁행위’ 였다.

 

그뒤 민영휘의 손자와 증손자, 현손자 등으로 상속됐다.

반면 민영휘 이름으로 직접 사정받은 토지는 국가귀속 결정이 났지만 그렇지 않은 토지들은 귀속대상에서 제외됐다.

대표적인 것이 민영휘의 아들 민천식의 묘가 위치한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토지다.

청주시 산성동 138번지와 142번지는 민영휘 본인의 이름으로 최초 사정된 것이 아니라 그의 첩 안유풍의 이름으로 사정됐다.

청주시 산성리 138번 번지와 142번지의 경우 일제가 작성한 토지등기부에는 최초 사정자로 ‘청주군 낭성면 산성리’로 기재돼 있다. 개인 소유가 아니라 마을 소유였던 것이다.

1930년이 되면서 이 토지는 민영휘의 첩 안유풍에 소유권이 이전된다. 등기부상에 나타난 이전 사유는 ‘매매’(賣買)다.

이 토지는 다시 1935년 조선신탁주식회사로 소유권이 이전된다. 토지등기부등본에는 이전 사유로 ‘신탁’이라고 기재돼 있다.

 

민영휘 첩 안유풍은 무슨 돈으로 땅을 샀을까?

 

민영휘 후손이 소유한 토지 중 국가 귀속 결정이 난 것과 나지 않은 것의 가장 큰 차이는 최초 사정자가 누구였나는 것.

그렇다면 안유풍이 소유한 토지 매입대금의 출처는 어딜까? 만약 안유풍이 실소유자가 아니라 민영휘의 자금에서 나왔다면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판단은 달라졌을까?

“(민영휘는) 축재(蓄財)에 비상한 노력을 다하여 한일합병 당시에 벌서 년 수입 소작료 벼 5만여 석이나 되는 전답 외에 경성부 내에 있는 토지가 가옥으로서 시가 1백만원 이상에 달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자본금 1백만원의 한일은행(韓一 銀行)을 설립한 외에 일한합병의 공에 의하야 은사금 수십만원을 받았는데 일찌기 통감부 재판소(統監府 裁判所)가 설치되자 민씨 가의 재산은 관권을 이용하야 불법한 축재를 한 것이라고 세평이 험악할 뿐 아니라 재산을 반환하여 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다수 있으므로 민영휘는 일체의 재산을 자기의 소유 명의로 함을 피하고자 하였다.”

(1938년 10월 1일, 잡지 『삼천리』 제10권 10호 ‘민씨가 비극, 일천만원 골육소(송)’ 기사 중에서)

안유풍 소유의 토지가 사실상 민영휘가 소유했을 가능성을 입증하는 실마리는 다름 아닌 민영휘의 장자인 민형식의 입에서 나온다.

1938년 10월 1일 잡지 『삼천리』는 민영휘의 장자 민형식이 그의 동생 민대식 등을 상대로 제기한 유산상속 소송관련 내용을 보도한다.

기사 제목은 ‘민씨가 비극, 일천만원 골육소, 몰후 二년 민영휘가에 슬픔의 싸홈은 열여, 구월이십일 제 일회재판이 서울서 열니다’이다.

부제는 자극적인데 ‘돈이냐? 골육(骨肉)이냐?’다.

기사에 따르면 민영휘의 큰아들 민형식은 아버지의 재산관리에 대해서 “일체의 재산을 자기의 소유 명의로 피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삼천리는 민형식이 동생들을 상대로 낸 소송을 내용을 소개한다. 기사에 따르면 민형식은 소장에서 “원고(민영휘의 장남 민형식)는 원래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을 뜻으로 하고 전혀 서도(書道)와 문학을 수학하였고 이에 반하야 피고(민영휘의 차남 등)들은 당초부터 은행의 업무 기타 재게에 종사를 하고 있었던 관계상 조선토지조사령에 의한 토지신고를 할 때 부동산에 대하야는 거의 다 피고들에게 신탁하고 동인 명의로 신고를 하여 사정(査定)을 받었으며 은행의 주식도 피고들의 명의로 신탁하고 또 선대 자신이 총재산을 관리하고 수익한 금액으로써 이후 매수한 부동산도 전부 피고 등과 피고 대식의 장남 병수(丙壽), 이남 병도(丙燾) 등에게 신탁”했다고 주장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민영휘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 상당 부분을 아들이나 주변인 등의 이름으로 사정을 받았고, 신탁해 관리했다는 것이다.

 

장남도 인정한 민영휘의 불법재산 축재

큰아들 민형식 조차 민영휘의 재산축적은 “관권을 이용하야 불법한 축재를 한 것이라고 세평이 험악”하다고 지적했다. 또 “재산을 반환하여 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다수 있으므로 민영휘는 일체의 재산을 자기의 소유 명의로 함을 피하고자 하였다”고 꼬집었다.

민형식의 지적대로 민영휘가 소유한 재산을 반환해 달라는 소송과 관련한 기사는 차고 넘쳐난다.

그중 몇 가지 기사를 소개한다.

 

< 민씨 간청 : 908년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

 

일전에 안주 이소사가 전 보국 민영휘씨의 집에 가서 민 씨의 옷을 잡고 크게 소리하여 왈.

나의 전장을 득탈한 일로 이미 재판하였는데 어찌 내여주지 아니 하나뇨. 하며 너와 나와 같이 죽자하는데 그 경상이 심히 위급함으로 민 씨의 대답이 성각하여 법반 소처할 것이니 물러가 기다리라고 간청하였다더라.

 

 

<민씨 탄식 : 1909년1월1일 대한매일신보>

민영휘씨 에게 전장과 전답을 빼앗긴 시골 사람이 많이 상경하여 민 씨를 가서 보고 경일에 특한 재산을 달라하며 독촉이 심하므로 민씨가 탄식하여 가라데 달라는 사람의 말대로 다 주면 나는 패가할 지경을 면치 못하겠다하였다는데. 지금 민 씨를 대하여 거소한자가 아홉 사람이 된다더라.

 

<빼앗긴 사람도 많지 : 1909년 2월 9일 대한매일신보>

의주 사는 전 사간 김우용씨가 보국 민영휘씨에게 가산을 빼앗겼는데 일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한다더라.

 

<민씨 뇌각 : 1909년 3월 17일 대한매일신보>

음성군에 사는 리 모가 보국 민영휘씨의 부친 민두호씨 에게 빼앗긴 칠십여석 추하하는 전답을 찾을 차로 루초 교섭하여 돈 이천오백량과 전조 십석은 찾았으나 나머지를 다 찾자보고 말한 즉 민 씨의 대답이 지금 와서 다소간 보조하라함은 가커니와 전답 값으로 언론하는 것은 반 불성실이라 하고 뇌각하였다 하더라.

※설명 뇌각(牢却) : 부탁이나 선물을 물리침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한계

 

친일파 거두 민영휘
친일파 거두 민영휘

 

친일파 민영휘가 재산을 안유풍이나 직계자손 등 타인 명의로 소유한 흔적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타인명의로 은닉한 재산은 현재까지 국가에 귀속되지 못한 상태.

그 이유는 단순한다. 2007년 친일파재산조사위원회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위원회가 민영휘의 친일 재산으로 조사할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러일전쟁 개전시 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민영휘가 자신의 명의로 취득한 재산’이 조사대상 재산이기 때문이다”

민영휘가 안유풍이나 그의 아들 등 타인의 명의로 숨겨논 재산은 애시당초 조사대상에서 빠진 것이다.

청주의 상징이라 할수 있는 상당산성. 이곳에 ‘조선신탁주식회사’ 명의로 위장된 민영휘의 재산이 오늘까지 지속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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