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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잊지 말자. 그 이름 친일

일제강점기 신사 잔해물 괴산 사리면사무소 존치…분수대로 사용 돼1960년대 일제 신사 비석, 박 정권 ‘재건국민운동’ 조형물로 재탄생

‘조선인을 일본인’에서 ‘朴통 정신개조’ 선전물된 日신사 잔해

2019. 02. 18 by 김남균 기자
괴산군 사리면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세워진 신사의 잔해물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괴산면 사리면 사리면사무소에 남아있는 일제신사 잔해물. 현재는 분수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계희수 기자)
괴산면 사리면 사리면사무소에 남아있는 일제신사 잔해물. 현재는 분수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계희수 기자)

조선에서의 안정적인 지배를 구축하려는 일제는 조선인의 정신마저도 일본인으로 개조하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집요하게 시행합니다.

1937일 일제는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라는 황국신민서사를 초등학생에게 암기와 낭송을 강요하고 성인에게는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란 글귀를 낭송하게 합니다.

한국인의 성씨를 일본식으로 개명하는 창씨개명운동 또한 마찬가지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하려는 집요한 정신공작입니다.

‘신사참배 강요’ 또한 그러한 개조운동의 하나입니다. 일제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천황제 국가를 확립한 일제는 종교로 내려오던 ‘국가신도’를 일왕에 복종하는 이념적인 제도로 변질시킵니다.

아예 일본제국의 헌법에 까지 명문화하더니 일본 소학교부터 행사로 제도화시킵니다.

그런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처음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신사를 들여왔지만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올 확대합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신사를 대대적으로 건립합니다. 나중엔 ‘1면(面) 1신사(神社)’ 원칙까지 세웁니다. 그렇게 해서 1945년 해방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1000여개가 넘는 신사가 넘쳐나게 됩니다.

 

해방 후 제일먼저 불태워진 일제 신사

 

1936년 10월 31일 조선신문 기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참으로 집요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학교까지 폐쇄할 정도였으니까요?

1936년 10월 31일 조선신문은 청주사립청남학교에 대한 휴교조치를 신사참배를 조건부로 해제한다고 보도했습니다.

1936년 10월 17일 매일신보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휴교명령을 받은 청주청남학교(현 청주 청남초등학교)가 개교를 위해 10월 15일 이 학교 학생 120여명이 교장 인솔하에 신사참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민중들은 전국 도처에 있던 신사에 찾아가 불을 질러 없애버립니다.

1936년 10월 17일 매일신보 기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괴산군 사리면에 있던 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주 주민들도 마을에 있던 신사를 없애 버립니다.

비록 신사는 불타고 없어졌지만 그 잔해는 남아있습니다. 괴산군 사리면 사리면사무소 안에는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 한 가운데에는 용 모양이 조각된 석물이 있는데 분수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석물은 사리면 일제신사에서 참배객이 신사참배에 앞서 손과 입을 씻는데 사용했던 일명 테미즈야(手水舍)로 전해집니다.

2013년 8월 13일 종합통신사 <뉴시스>는 <괴산 사리면사무소 분수대에 숨은 아픈 역사>라는 기사에서 “사리면 신사는 광복 후 격분한 주민이 헐어버렸고 그곳에는 많은 석물이 나뒹굴고 있었다. 1956년 봄에 당시 손근성 면장이 주민 100여 명을 동원해 신사 터에서 이 수반을 면사무소로 옮겨 연못을 파서 그 안에 놓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재건청년회‧부녀회 이 비석의 정체는?

 

괴산군 사리면 하도리 마을에 세워진 비석군. 사리면에 있던 일제 신사의 잔해물로 1961년 재건청년회 등 국민재건운동과 관련된 조형물로 재활용됐다.(사진 김남균 기자)

괴산군 사리면 사리면사무소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도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재건청년회’, ‘하도농협협동조합’, ‘하도’라고 새겨진 3개의 비석이 남아있습니다. 비석에는 ‘단합’, ‘자립갱생’이란 단어부터 ‘협동정신 발휘하여 농촌부흥 이룩하자’란 구호까지 이것저것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석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보아왔던 비석의 모양과는 사못 다릅니다.

이 비석 또한 사리면에 있던 신사에서 가져온 비석이라고 전해집니다. 하도농업협동조합 비석 뒷면에 ‘(단기) 4294년’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61년에 설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뉴시스>는 2014년 8월 13일 <재활용한 일제잔흔 일본신사 석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961년 당시 면장이 하도마을 입구 맞은편 언덕 신사 터로 들어가는 길 양옆에 놓여 있던 석재를 옮겨다 글자를 새기고 세워 놓았다”고 했습니다.

1961년이라는 시기나 비석에 새겨진 ‘재건청년회’, ‘재건부녀회’란 문구에서 보듯 이 비석은 박정희 정권의 ‘국가재건 국민운동’ 과정에서 세워진 비석으로 보입니다.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1961년 6월 12일 ‘국가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을 공포합니다. 그리고 각 시‧군‧구 지부에 여러 부서를 두고 각 마을 리 단위에 ‘재건위원회, 재건청년회, 재건부녀회’를 두게 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조직을 통해 반공이념을 선전하고 국민계도와 군사혁명의 정당성 홍보를 위한 강연 및 강좌를 진행합니다. 또 국민단합운동, 학생봉사, 계몽활동, 허례의식일소를 위한 표준의례준칙제정, 국민저축, 의생활개선, 상도덕 앙양 등 국민총동원운동을 전개합니다.

일종의 정신계몽운동 인데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양새입니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황국신민화를 꾀하면서 정신개조 운동을 했던 모습과 비슷하죠. 일재 잔재인 신사의 잔재물은 이런 식으로 재활용 돼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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