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의 유일한 소설 <벨 자>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20
윤정용 평론가

▲ 실비아 Sylvia , 2003 감독 크리스틴 제프스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기네스 팰트로 블라이드 대너, 루시 데이븐포트
“남자가 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다면, 나도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주겠다.”
조금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경구다. 아니면 누군가를 향한 저주(?)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문장은 실비아 플라스의 유일한 소설 『벨 자』에 나오는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다. 『벨 자』는 한 천재 작가가 신경증에 빠져드는 과정을 독특하고 날카롭게 묘사한 플라스의 자전 소설이다.

『벨 자』를 살펴보기 전 먼저 플라스의 삶을 살펴보자. 1932년에 태어나 1963년에 세상을 떠난 플라스는 한 마디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세계적인 땅벌 권위자였던 생물학자 아버지의 때 이른 죽음, 명문 스미스 대학을 최우등생으로 졸업, 우울증과 자살 기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영국 캠브리지 대학 유학, 천재 시인 테드 휴즈와의 결혼, 그리고 전쟁 같은 불화 끝에 이혼, 기적 같은 창작력으로 시작에 몰두, 하지만 결국 다시 찾아온 우울증으로 두 아이를 옆방 침대에 놓아둔 채 머리를 처박고 가스를 틀어 겨우 서른 한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자살. 거짓말과도 같은 드라마틱한 그녀의 삶은 그녀의 글만큼이나 신화가 되었고 대중적으로 소비되었다. 마치 체 게바라의 그것처럼.

자전적인 이야기

아이러니컬하게도 플라스의 대표작들은 휴즈와의 이혼 후 개인적으로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쓰인 작품들이다. 실제로 그녀가 남긴 작품들을 보아도 플라스는 이런 드라마틱한 삶의 편린들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데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에너지를 다 쏟아 부은 듯하다. 때로는 일부터 문학 작품을 위해 극적인 삶을 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플라스는 그 정도로 극단적인 자전적 작가였고, 결벽증처럼 집요하게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냈다. 그 결과 그녀의 유명한 일기는 물론이고, 로버트 로웰의 고백시 전통을 계승했다는 평을 듣는 시들도, 나아가 심지어 유일한 소설인 『벨 자』까지도 자서전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벨 자』에서의 문학적 페르소나는 방탕한 유혹녀가 되었다가, 순진한 소녀가 되었다가, 우등생이 되었다가, 파티걸이 되었다가, 타인과 외부 세계를 향한 폭력성을 보여주다가, 내면적인 자기 파괴 충동을 보이다가, 끊어질 듯 팽팽한 신경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같기도 한, 그야말로 무수한 자아를 마치 옷가지처럼 바꿔 입어가며, 불안하게 흔들리는 유동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다.

이런 다층적인 자아의 유동성을 실감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작가로서 플라스의 한결같은 정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독설과 냉소를 퍼부었다. 때로는 속물적인 욕망이 드러나기도 하고, 질투와 허영에 들뜬 나약한 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심지어 의식이 붕괴되어가는 순간에서조차도 플라스는 치열하고 과감하게 기록한다.

플라스의 정직함은 그녀의 문학에서 빛을 발한다. 그녀의 삶과 문학은 마치 무수한 거짓 가면들로 점철된 삶 속에서 침묵하던 참된 자아가 느닷없이 백열처럼 타오르며 언어를 찾아 말하는 눈부신 사건으로 다가온다. 일상의 비루하고 속물적인 생활의 흔적들은 그녀에 의해서 문학, 특히 ‘시’로 승화한다. 플라스는 시로 자아를 표현하고 자아를 완성하고, 명성과 불멸을 성취하고 싶다는 절대적인 욕망, 이 욕망 이외의 모든 것이, 생활과 사랑과 행복마저도,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했다. 이 욕망의 절대성과 숭고함은 플라스를 범속한 인간들과 영원히 갈라놓았다.



타협하지 못한 삶, 끝내 자살

하지만 이 절대적인 욕망의 좌절은 욕망이 존재의 본성과 직결된 만큼, 곧장 죽음의 충동으로 이어진다. 플라스의 좌절과 죽음의 충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에서도 비롯된다. 즉 1950년대 미국은 아직 여성의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보수적인 가정 담론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멋진 남자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개인적 바람’과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사회적 욕구’는 계속 불화를 겪게 되고, 마침내 이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더욱 절망했다. 따라서 시인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그녀는 타협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벨 자』는 실비아 플라스가 남긴 유일한 소설로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한 달 전 필명으로 출간했다.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나 상황을 다루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인물들을 가명으로 등장시킨다. 따라서 이 소설은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 장르로 삶을 기록하려는 플라스 문학의 자서전적 경향을 대변한다.

즉 소설의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가 우울증과 자살충동으로 빠져드는 과정은, 뉴욕의 《마드모아젤》에서 인턴 기자 생활을 하고 하버드 서머스쿨에서 프랭크 오코너의 작문 강좌를 수강하는데 실패한 후 극심한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가 수면제 자살을 시도했던 플라스 자신의 삶의 궤적과 일치한다.

또한 버디 윌라드와의 스키장 사고는 고등학교 시절의 연인인 딕과 함께 사라낙에 가서 다리를 부러뜨렸던 사건의 재현으로 여겨지며, 후원자인 작가 필로메나 기니는 올리브 히긴스 프라우티와 병치된다. 친절한 여의사 닥터 놀란은 정신과 주치의로서 오랜 인연을 맺었던 닥터 루스 보이셔와 겹쳐진다. 이처럼 이 소설의 주요 사건과 등장인물은 플라스 자신의 삶의 단편에서 비롯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