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새로운 판화양식 구축, 작품 580여점 제작…인사동에서 29일까지 대규모 전시

진천 백곡저수지길을 따라 가다 보면 눈 내린 겨울 저수지의 정취가 시선을 붙잡는다. 백곡저수지 옆 두주마을 꼭대기 집. ‘한국목판문화연구소’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나무명패가 걸려있다. 김준권(59) 판화가의 작업실이다. 2층에 작은 전시실도 갖춰 연구소를 찾는 이들이 화가의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김 화백은 10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자신의 판화 350점을 수록한 작품집 <나무에 새긴 30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29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에는 180여점의 판화와 20여점의 초기유화가 전시된다.

사진/육성준 기자

김준권 화백이 판화가의 길을 걸은 지 30년, 화가로 입문해 활동한 것은 40년이 됐다.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초기에 유화로 작품 활동을 했다. <나무에 새긴 30년> 화집에는 초기에 그린 유화작품 ‘어머니’ ‘오월 광주’ 등이 실려 있는데, 이들 작품에서 섬세하면서도 묵직하고 대범한 청년 김준권의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김 화백은 개인 창작을 넘어서 민중미술운동의 수단으로 판화를 선택했다.

1980년대 판화는 대중에게 시대의 사유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주요한 예술매체였다. 하지만 소통의 도구이자 민중미술의 상징으로서 한 시대를 대변했던 판화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대중들이 판화라는 미술장르에 대한 고정된 인상을 갖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수묵목판화’, 한국 전통 판화기법

김 화백은 “30년간 먹으로 목판을 찍고 매년 전시회를 열었는데 지금도 목판화 작품이 맞느냐는 말을 듣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화백의 판화는 인쇄된 화집으로 보면 얼핏 회화로 읽힌다. 김 화백은 “판화는 선과 각으로 표현한다는 인식이 굳어져 있다. 민중미술의 영향도 있지만 판화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면서 면과 색으로 표현하는 목판화기법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현대 목판화는 유성안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팔만대장경은 목판에 먹으로 찍었다. 먹의 번짐과 농담으로 표현하는 전통 수묵화 양식은 목판에도 적용되는 우리 고유의 미술양식”이라면서 자신이 구축한 목판화기법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 새로운 한국적 판화양식에 ‘수묵목판화’라고 이름 붙였다. 색을 넣은 것은 ‘채묵목판화’다. 현재 중학교 교과서에도 판화기법의 하나로 김 화백의 ‘수묵목판’을 소개하고 있다.

▲ 김준권 화백의 <청보리밭에서…> 다색목판 2005.

김 화백의 한국목판화의 기법과 이론 정립에는 중국과 일본의 전통목판연구가 기반이 됐다. 중국루신미술대학의 연구원으로 유학한 인연은 객원교수로서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다.

김 화백은 90년 초에 진천으로 내려왔다. 당시를 “작품활동과 삶에 변화가 필요한 때였다”고 말하는 그는 이후 산수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고향과 한국의 산천, 그의 작업실이 있는 진천의 백곡저수지와 두주마을도 목판에 새겨졌다.

강하거나 섬세한 선을 만들어 내는 판화가의 ‘칼 맛’이 먹빛 속에 스며들었다. 먹의 번짐은 화가의 ‘손 맛’에 달렸다. 노을이 지고, 물안개가 피어나고, 어둠이 내리고, 새벽하늘이 열리는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숨 쉬는 듯 화폭에 담겼다. 그는 판보다 먹을 강조했다.

30년 깎고 새긴 목판이 1만장

1994년 김 화백이 수묵목판화로 첫 전시회를 열 때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평론에서 김준권의 가장 큰 미덕은 ‘조형적 성실성’이며, 그것이 그의 작업과 작가상에 대한 믿음의 근거라고 밝혔다. 작은 목판에도, 길이 2m가 넘는 대형 목판에도 가는 붓이 지나간 듯 섬세한 칼의 질감은 변함이 없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십 개의 목판에 그림을 새기고 수십 번을 찍어내면서 색이 번지고 스미는 정도를 정확히 예측하기까지 그가 나무에 새긴 시간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난 30여 년간 제작한 판화가 총 580여점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새기고 깎은 목판은 1만장이 넘는다.

▲ 판화인생 30년을 정리한 <나무에 새긴 30년>, 423쪽의 대형화집으로 750부 한정본 출간.
“1970년대 고교시절부터 정치상황에 관심이 높았다. 고교시절 이영희 씨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책을 읽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바로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김 화백은 80년대 교육운동과 민중미술운동의 구심에 있었다.

졸업 직후 미술교사로 재직 중에는 교육민주화운동을, 해직 후에는 판화작업을 통한 민중미술운동에 열중했다. 91년까지 전국민족미술인협의회 사무국장을 하며 민주열사들의 장례의식을 치른 것도 수차례였다. 그가 젊음과 열정을 바친 역사적 시간들은 그대로 이후 한국의 목판화가로서 정신의 뿌리가 됐다.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김준권 화백의 화업 30년에 대해 “한국의 현대사가 만들어낸 화가로, 감히 우리가 세계에 자랑해도 좋은 예술가”라고 평했다. 이번 화집의 대표그림은 폭 4m 길이가 1.6m의 대형 수묵목판화 <산운(山韻)>이다. 숨 쉬며 출렁이는 국토를 이토록 넉넉하고 깊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김 화백이 지나온 삶이 이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김 화백은 한 달 전 갑작스럽게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도 잘 회복되어 요즘은 담배와 믹스커피를 먹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잘 따르고 있다고 했다. 조금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목판 앞에 선 그의 눈빛과 기색에는 여전히 칼칼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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