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흑백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역사란 선과 악으로 양분되어 대결하고 발전돼온 것만은 아니다. 역사는 시대를 따라 수직적으로 발전을 해 온 것이 아니라 때로는 모순조차도 포용하면서 상호보완적 관계아래 복합적 양상을 띠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역사를 보는 시각은 다양해야지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 대결논리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를 들면 흥부대 놀부, 콩쥐대 팥쥐, 인현왕후대 장희빈 식으로 역사의 플롯을 전개하며 선의 승리라는 해피엔딩 식의 고전소설을 역사에 대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표면적으로 남하정책을 내세우고 있지만 속사정은 4 백 여 년 간 고구려의 수도 집안에서의 호족 발호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독차지한 장희빈을 보면 인현왕후는 선의 대명사고 장희빈은 악녀의 화신이다. 과연 그럴까. 장희빈이 표독스럽기는 했어도 범죄인은 아니며 죄가 있다면 임금(숙종)을 지극히 사랑한 죄밖에 없다.이들은 사실상 당쟁의 희생물이었다. 장희빈 뒤에는 남인이 버티고 있었으며 인현왕후는 서인(노론, 소론)이 배후세력으로 작용하였다. 장희빈의 소생 세자책봉을 두고 서인이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이를 강행하였고 송시열 등 많은 서인이 유배되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사랑싸움은 서인과 남인의 대리전인 셈이었다. 나중에 마음을 돌린 임금은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하는 항간의 노래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각각 미나리와 장다리에 빗대어 부른 것이다.

헤이그 밀사하면 우선 이준 열사가 떠오른다. 국권을 일제에게 빼앗긴 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을 정사(正使)로, 이위종과 이준을 부사(副使)로 하는 소위 헤이그 밀사를 파견한다. 이준열사는 부사이나 현지에서 분사(憤死)하는 통에 그의 행적이 매우 돋보인다.

우리는 초등학교시절 대부분 이준 열사가 만국평화회의에서 할복자살하였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나중에 ‘이상설 일기초‘가 발견되면서 와전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준 열사가 분사한 것은 사실이나 할복자살이 아닌 급성 패혈증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백제멸망 이라는 낙인 때문에 삼천 궁녀나 데리고 놀기나 좋아하는 패륜적 임금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은 영특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었으며 귀족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망국의 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의 인식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일반적으로 우장춘 박사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전북대 김근배 교수에 따르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은 1943년, 교토제대의 기하라 히토시이며 우장춘 박사는 귀국후 대중강연을 통해 이를 소개하고 직접 재배를 하여 일반인들에게 자주 보여줬다. 우장춘 박사가 육종학자로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큰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나 씨 없는 수박을 처음 개발한 것은 아니며 최초의 농학박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초의 농학박사는 일본 홋가이도 제국대학에서 곰팡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호식 씨임을 김 교수는 밝히고 있다.

역사에서는 ‘그랬을 것’이라는 피상적 관념을 극복하고 행간 속에 묻힌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
/ 언론인, 향토학자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