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락 청주시 정신건강증진센터

▲ 최영락 청주시 정신건강증진센터
우리나라에서 한 해 자살자는 1만 6000여 명에 달하고 있다. 이는 20년 전의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수와 비슷한 수치이다. 당시 사람들은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이 향후 한국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될 것으로 내다봤지만 역설적이게도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률은 정부의 각종 노력으로 그때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이처럼 나라 전체의 사망자 통계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개인의 앞날을 알기는 더욱 어렵고 마음의 세계를 살펴보기는 더욱 어려워 보인다.

개인의 마음 차원에서 죽이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가 있을까? 분명히 법적인 차원에서 차이가 있다. 타살과 자살이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이 구분이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세계에서는 구분이 어려워 보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과거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남자가 있었다. 결국 그 남자는 자살하지 않고 우울한 상태로 살다가 차를 몰고 애견센터로 돌진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한 젊은이을 죽게 만들었다.

필자는 이 가해자와 면담을 하며 이 사람이 자살로 사망했다면 정말 한 젊은이를 살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목숨의 경중은 우리가 따질 수 없는 일이며 우리 자체도 한 치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견센터로 돌진한 사람은 우울한 상태에 더해 키우던 애완동물이 학대를 받고 있다는 환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동안의 고통스러운 삶으로 인해 자신을 죽이고 싶었던 마음이 결국 죄 없는 젊은이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말았다. 죽는 것이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또 한 남자가 교도소를 출소하고 갈 곳이 없자 교도소 동료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배려했다. 한 동안 잘 지냈는데 어느 날 장난을 치다가 중학생이 남자의 얼굴을 발로 찼다. 흥분한 이 남자는 이 중학생을 살해했다.

면담을 통해 이 남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죽도록 폭력을 당했었고 아버지의 사망으로 폭력은 끝났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맞았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때리거나 무시하면 흥분을 견디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 남자는 자신이 과거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죽은 중학생을 위해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자신이 죽인 것은 타인이지만 또한 자신을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정신의학의 역사가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변치 않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진리가 있다. 바로 가해와 피해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마음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을 가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고,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결국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 통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가해와 피해가 함께 작용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본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꿈 분석에서 그들은 어둡고 무서운 산속의 학교를 다니며 공포에 쌓인 채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이처럼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듯이 죽이는 것과 죽는 것도 마음의 세계에서는 정말 다르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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