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경험 바탕으로 한 소설,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⑮ 

윤정용 평론가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고독한 유년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요소가 강한 『유리동물원』(1945)과 이 작품에서 다루어진 중요한 주제와 등장인물들을 보다 발전시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7)를 통해 극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후 아서 밀러와 함께 유진 오닐 이후의 전후 미국 현대극을 주도한다.

그는 기존의 브로드웨이의 ‘자연주의 연극’ 전통에 기반을 둔 등장인물의 성격묘사, 무대 설정, 현실의 생생한 묘사에 치중하기보다는, 현실과 꿈의 결합을 통해 상징주의 연극을 구현한다.

윌리엄스가 브로드웨이의 전통과 단절한다는 것은 미국 사회의 도덕적 · 정치적 분석을 포기하고, 감정적으로 충격을 받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성심리적인 내면의 삶의 설명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윌리엄스는 특히 영화 감독 엘리아 카잔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기실 엘리아 카잔은 나중에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를 연출하기도 한다.

몰락한 미국 남부가 배경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감독 엘리아 카잔 출연 비비안 리, 말론 브랜도, 킴 헌터, 칼 말든 더
윌리엄스의 작품은 대체로 새로운 기계 문명에 의해 쇠퇴하고 몰락한 미국 남부를 공간적 배경으로, 가족 내에 존재하는 불안한 감정 및 해소되지 못한 ‘섹슈얼리티’ 문제를 전경화한다.

윌리엄스의 주인공들은 주로 자신의 고향에서 추방당하거나 소중한 안식처를 박탈당한 사회로부터 격리된 자들로서, 주로 예술가, 정신병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방인 등이다. 그들은 현실과 괴리되어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고 무조건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타인에게서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동반자를 끊임없이 갈구한다.

즉 그들은 섬세하고 연약한 인물들로서 차갑고 낯선 환경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덧없이 살아간다. 또한 현실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허위와 자기기만으로 가득 차 있고, 음주와 섹스에 탐닉하며 환상을 추구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랜치와 『유리동물원』의 로라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자들’로서의 윌리엄스 등장인물의 전형이다. 그들은 자신을 속박하는 정신적 혹은 물질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갈구하지만, 그러한 자유에 수반되는 외로움이라는 무서운 희생을 두려워해 결국 포기하고 만다.

블랜치 역시 로라와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의 경험의 반영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은 때로 작가 자신의 ‘분신’(persona)으로 읽혀질 수 있다. 윌리엄스는 특히 블랜치를 통해 그가 종종 쓰레기 취급을 했던 호화로운 호텔 방처럼 그것들이 그를 매혹할 때 그를 거절했던 강요된 타락한 공공의 정체성으로부터 개인적인 자아의 구원을 극화하려고 시도했다.

환상과 현실의 세계가 충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요 플롯은 스탠리의 블랜치에 대한 남성성을 통한 위협과 가부장적 폭력이다. 계층과 혈통에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낸다.

어쩌면 처음부터 둘 사이에는 갈등과 충돌이 예정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들의 물리적 충돌은 그들의 이름에서부터 암시된다. 스탠리 코왈스키에서 스탠리는 고대 영어에서 ‘돌’을 의미하고 코왈스키는 폴란드어로 ‘대장장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블랜치 두보이스는 ‘흰 숲’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장장이가 흰 숲을 파괴하듯이, 실제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스탠리의 검은 이미지는 블랜치의 흰 이미지를 파괴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랜치의 환상의 세계와 스탠리의 현실 세계는 끝임 없이 충돌한다. 그녀에게 현실이란 옛 남편의 성적 도착과 자살, 벨 리브의 상실, 그 후의 문란한 사생활 등 점철된 고통과 부끄러운 과거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낭만적인 남부 시절의 우아함, 세련됨, 예법, 화려한 의상과 보석 등에 집착하며 환상에 몰입한다.

한편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현실세계의 대표자 스탠리에서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와 육체적인 욕망만이 중요하다. 스탠리와 그의 동료들은 물질적 삶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곳에서의 삶은 본능의 수준에서 추구되므로 선의 개념이나 악의 개념도 없고 전통적인 도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블랜치가 자신의 속물근성을 경멸하는 것을 알지만, 그녀의 추악한 과거를 약점으로 나약하고 민감한 블랜치의 미화된 환상의 껍질을 벗기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녀를 절망에 빠뜨린다. 현실에 든든한 바탕을 둔 속물적이고 잔인한 스탠리의 현실 세계가 종이 갓처럼 망가지기 쉬운 블랜치의 환상의 세계를 무너뜨린 것은 바로 스탠리의 세계가 지닌 폭력성과 야수성 때문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지젝이 폭력의 양상과 결과에 대해 명료하게 논증했듯이, 폭력은 단순히 감정의 배출구가 아닌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유형, 무형의 고차원의 전술이다. 폭력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현대 미국 희곡, 더 넓게 보자면 현대 미국 사회에 만연한 문제이기도 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통해 나타난 남성 또는 남성중심의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가부장적 폭력의 양상을 살펴보았지만, 이 외에 일상적으로 편재한 다양한 양상의 폭력에 대해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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