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제 한얼경제사업연구원장

▲ 전병제 원장
‘로봇’이란 말은 20세기 전반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작가 카렐 차페크가 희곡 <로봇 R.U.R.>(1920)을 통해 첫 선을 보인 이래 문명사적 단어가 되었다(물론 읽어 보지 못했다). 이 차페크의 다른 작품에 <최후의 심판>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약간의 각색을 곁들인다면 이렇다.

껄렁한 청년 하나가 사고로 죽어 하느님의 법정에 섰다. ‘최후의 심판’을 받는 자리다. 그는 당연히 재판장석에 앉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재판장을 비롯한 재판관석의 판사들은 모두 지상에서 판사노릇하다 하늘로 간 사람들이었다.

청년은 물었다. 도대체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나는 여기에 있네. 돌아다 보니 그리스도는 침침한 증인석에 좀 외롭게 앉아 있었다. 아니, 주님이 심판자가 아니십니까? 그렇긴 하네만 나는 심판할 수가 없네. 나는 자네가 죄인이라는 걸 알지만 동시에 왜 자네가 그 죄를 지었는가도 안다네. 모든 인과(因果)를 알고 이해하는데 어떻게 심판이 가능하겠나?

그럼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재판관들이 물었을 때 도와주는 증인일 뿐이라네. 내 증언을 듣고 형량은 저들이 정한다네. 재판장은 약간 권태로운 표정으로 주님의 증언을 경청한 후 청년에게 선고했다. - 13세 소년시절 골목에서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긴 것부터 커가며 푸른 가을하늘 한 번 제대로 사랑해 보지 못한 시간모독까지 모두 유죄, 은하RUR1004 갱도에서 돈으로 깔 수도 없고 가석방도 없는 45일 강제 노역형에 처한 후 사바세계로 추방한다. 땅땅.

요즈음 지상에서도 비슷한 선고가 이어진다. 이른바 28사단 윤일병 폭행 사망사건. 몸서리쳐지고 천인공노할 병영내 이 명백한 살인행위에 대하여 군 검찰은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10월 30일 육군 3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은 고의성이 있는 살인행위는 아니라는 법리를 들어 살인죄는 무죄로 판단하고 45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주범의 나이가 26세이니 감형이 없다면 71세에나 세상 빛을 본다는 사형보다 잔인한 의미일 수 있는 판결이다.

그래도 어쨌든 윤일병은 죽고 그를 악마처럼 죽인 가해자는 생명을 보장 받은 셈이다. 말이 없었던 윤일병의 어머니는 “이 나라를 떠나겠다”며 통곡했다. 11월 11일 광주지법 형사합의 11부가 69세의 세월호 이준석 선장에게 유기죄 및 업무상과실죄 등만을 물어 36년 징역형을 선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월호 유족들 또한 진작부터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절규해 왔다.

인터넷과 신문, 그리고 술자리에서는 무식한 법감정과 냉철한 법리 사이의 간격 만큼이나 심오하기도 하고 양아치 같기도 한 논쟁이 격렬하다. 양형을 정하는 판사들의 심리상태에 대한 분석도 있다. 판사들이 사형선고에 대하여는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상투적인 강박관념을 가졌다는 진단이다.

반면 판사들은 대체적으로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표정이다. 진상이 훨씬 많이 보이는 법대(法臺)의 중압감은 다르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는 문제이기 때문에 시정의 장삼이사가 ‘개작두를 대령하라’고 거품을 무는 감정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거 어디서 들어 본 수사(修辭) 아닌가. 그렇다. 카렐 차페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다. 신도 어려워 최후의 양형을 세속의 판사들에게 맡긴 인간운명의 재단(裁斷)을 판사들이 걱정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세속이건 저승이건 재판정이 신의 권위를 부여받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은 신의 피고용인 신분이다. 신이 아니다. 논쟁의 여지는 크지만 판사는 형벌을 통해 행위의 응징(반성하든 아니든)을 대행하는 자이지 운명을 심판하는 자가 아니다.

법관이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고의·태만·무능·편견 등을 포함한 진실의 오판 가능성과 보다 큰 권력에 대한 굴종이다. 예수가 증언하는 정도의 명백한 진실에 대해서라면 법대의 판사와 시정의 범부가 그렇게 큰 거리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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