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환 충북대 교수

▲ 김승환 충북대 교수
어느 날, 속리산이 청주 성안길을 걷는 K에게 물었다. “K, 너는 충북사람이냐?” 백두대간의 신령스런 산이 묻는 질문에 황송한 K는 “그렇습니다. 저는 충북사람입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아름답고 기품 있는 속리산은 “그렇지, 그래. K 너는 충북사람이니 충북인의 자긍심과 충북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거라.”라고 말하고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튀세르가 말한 호명(interpellation)이고, 호명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누구다”라는 정체성이 확립된다.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떤 존재”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나의 본질과 실체”로 이행한다. 가령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K의 아내이고 B와 S의 어머니다”, “나는 충북도청의 공무원이다”와 같이 주체적이고 주관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는 자기호명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 정체성의 논리적 수식은 X = Y로 표시되는 같음(sameness)이고 질적 정체성과 수적 동일성(identification)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지만 현재완료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충북은 의인화된 인격체이므로 충북의 정체성은 충북인의 정체성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충북인의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과 충북의 지역정체성(地域正體性)이 합치되는 지점에서 충북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현재 충북에 사는 사람은 모두 충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현재 충북에 사는 사람은 ‘충북사람’ 즉 지역분류의 범주에서 충북인(忠北人)일 뿐이고,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나는 충북인’이라는 자기 호명이 없으면 충북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충북이 고향이고, 충북에서 태어나서 학교를 다녔으며, 현재 충북에 살더라도 ‘나는 충북인’이라는 의식적 자기규정이 없으면 충북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 반대도 참이다. 가령 충북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특별한 연고도 없지만 자신을 충북인으로 규정하는 사람의 정체성은 충북인이다. 이처럼 충북의 정체성은 충북인이 아닌 다른 존재와 변별적인 차이를 가지는 한편 충북인만의 고유한 특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충북인의 특질을 공유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인의 특질을 공유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 충북의 정체성이 더욱 선명해진다. 반면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은 지향성 내지 열망 또는 전망이므로 정체성과는 다르다.

충북의 정체성은 개인이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라, 대다수의 충북인이 가진 특질과 본질을 보편적으로 추출한 의식이다. 지난 30여 년간 논의된 것을 수렴하여 결론을 말하면 충북(인)의 정체성은 ‘청풍명월, 선비정신, 중용지도, 중원의식, 저항정신을 가진 온유돈화(溫柔敦化)하고 강직한 충북지역의 한국인이자 진보의 열망을 가진 열린 세계시민[Gentle and Upright World Citizen]’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전추세리(專趨勢利), 세리장학, 양반(兩班) 등 충북인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충북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타자의 눈에 비친 충청인(忠淸人)의 기질성정 또는 충청인의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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