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⑪
윤정용 평론가

흔히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문학 작품의 ‘개작물’(adaption)이라고 불린다. ‘1차적인 것’ 또는 ‘원래의 것’으로서의 문학 작품에 비해, 영화는 ‘2차적인 것’ 또는 ‘재생산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작물’이라는 용어에는 이미 상대적인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문학 작품을 영화로 만든 영상물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호적이지 않다.

이들 영화를 평가할 때는 주로 영화적 완성도보다는 영화가 얼마나 원본에 충실하게 재현했느냐가 핵심 논제였고, 그에 따라 영화의 질적 평가가 이루어져 왔다. 이제 문학과 영화는 ‘상호텍스트성’의 맥락 또는 관점에서 파악될 때 보다 해석의 폭이 확장되고 유의미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문학과 영화의 상호텍스트성을 잘 예거하는 작품이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 베니스에서의 죽음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출연 더크 보가드, 로몰로 발리, 마크 번스, 노라 리치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감독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원작의 내적 및 외적 서사구조, 즉 주제, 모티프, 등장인물, 그리고 등장인물 간의 관계 등을 어느 정도 그대로 수용한다. 비스콘티의 영화도 전체적으로 이런 수용적 자세를 견지한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주인공 소설가 구스타프 폰 아쉔바흐는 비스콘티의 영화에서는 동명의 소설가로 변형되고, 실제 역사적 인물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삶, 그리고 그의 예술과 교직되면서 흥미가 배가된다.

미소년에게 매료된 작곡가

영화에서 주인공인 작곡가 아쉔바흐의 전기, 인생관 또는 예술관은 원작 소설의 주인공인 소설가의 그것들과 거의 일치한다. 즉 ‘예술(가)의 존재 의미와 방식’이라는 원작의 주제가 소설가가 아니라 작곡가의 문제로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소설과 영화는 큰 차이는 없다.

예컨대 원작 소설에서 아쉔바흐는 자신이 평생 동안 지켜온 북유럽의 ‘차가운 아버지의 세계’를 떠나 ‘열정적 어머니의 세계’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으로 ‘이국적인’ 물의 도시 베니스에 도착하고, 그 곳에서 폴란드의 미소년 타치오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면서 내적 분열과 함께 종국에는 파멸을 맞는다. 영화 속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방향’과 ‘속도’에 있어 소설과 영화는 차이를 보인다.

소설에서는 아쉔바흐가 타치오에게 매혹되어 파멸해가는 과정이 수많은 문학적 장치를 통해 비교적 서서히 암시적으로 비치는데 비해, 영화에서 아쉔바흐는 베니스에 도착하기 전 이미 심신의 균형을 잃은 상태이고, 그의 병이 깊은 만큼 그가 도착한 베니스 역시 전염병이 창궐해 있다. 영화적 공간이 따뜻한 베니스가 아닌 전염병이 창궐한 베니스로 설정됨으로써, 베니스는 주인공에게 ‘따뜻한’ 도시보다는 ‘낯선’ 도시이며, 이미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 공간이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주인공이 예술에 대한 진지하게 성찰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주인공과 그의 친구 알프리드가 예술에 대한 진지한 토론으로 변형되어 재구성되는데, 소설에서처럼 몽타주기법으로 삽입된다. 비스콘티는 몽타주 기법을 통해 소설과 영화의 상호텍스트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비스콘티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파우스트 박사』 모티프를 삽입한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에스메렐다’는 원래 『파우스트 박사』에 등장하는 사창가 여인의 이름인 동시에, 또한 ‘나비’를 상징한다.

『파우스트 박사』에서 에스메렐다는 지극히 정신편향적인 작곡가 레버퀸의 암묵적 요구에 따라 하루 밤의 동침 후에 그에게 매독을 옮긴다. 그녀는 일종의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천재적 작품을 작곡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을 원하는 파우스트-레버퀸에 대해 메피스토적인 마력의 알레고리로 나타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에스메렐다는 시작부분에서부터 인상적이다. 무엇보다도 아쉔바흐가 베니스로 타고 오는 여객선의 이름이다. 따라서 에스메렐다는 앞으로 다가올 아쉔바흐의 베니스에서의 파괴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운명을 암시한다.

영화 속에서 아쉔바흐는 타치오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혼란에 빠진다. 그런 아쉔바흐 앞에서 타치오가 피아노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친다. 바로 이어지는 몽타주 시퀀스에서, 사창가를 찾은 아쉔바흐를 앞에 두고 에스메렐다가 똑 같은 곡을 피아노로 친다.

그리고 타치오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아쉔바흐가 젊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한 뒤 타치오를 쫓아 베니스의 온 골목을 헤매며 절망에 차 몸을 떠는 장면에 이어, 클로즈업되어 나타난 그의 흰 모자에 달린 ‘나비’ 모양의 장식 띠에 의해 또 다시 그 의미가 확인된다. 요컨대 에스메렐다라는 기호는 소설과 영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상호텍스트성을 배가한다.


영화 속은 숨은 기호들

비스콘티의 영화 속에 도입된 여러 서사적 요소를 결합시키는 핵심적 상징의 기능은 음악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특히 말러의 교향곡 3번 4악장 ‘짜라투스트라’ 모티프와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모티프는 영화 전체에서 서사 전개와 주제 전달을 위한 주도적 모티프로서 기능을 발휘한다.

특히 교향곡 5번 4악장은 영화 처음부터 사랑과 죽음의 모티프로서 모든 언어를 대신하여 주인공의 운명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암시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말러의 음악이 모든 것을 대신하기 때문에, 말러의 음악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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