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스>를 다시쓰기 한 <포>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⑩

윤정용 평론가

한 국가가 식민화 될 때, 식민화된 국가의 국민은 대체로 세 가지 방식으로 식민화에 대응한다. 첫 번째는 적극적인 ‘거부’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수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방식은 첫 번째와 두 번째와는 다른 맥락에서 다소 무기력한 ‘방관자’적 태도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존 쿳시의 <포>는 식민화가 되었을 때, 식민화의 ‘타자’의 식민화에 대한 대응 유형을 잘 예거한다. 두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프라이데이가 등장한다.

<포>는 기본적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쓰기’(rewrite)했기 때문에, 두 작품의 기본 골격과 등장인물이 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데이는 외모에서부터 하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차별된다.

이 글에서는 주로 <로빈슨 크루소>와 <포>에서 식민화의 타자인 프라이데이의 식민화에 대한 각각의 대응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섬을 탈출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

▲ 감독 루이 브뉘엘의 영화 ‘로빈슨 크루소’
일단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프라이데이의 외모를 어느 정도, 유럽인과 비슷하게 설정함으로써, 백인들에게는 ‘기분 좋음’과 ‘부드러움’을, 흑인들에게는 ‘불쾌함’과 ‘잔혹성’이라는 상반적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백인들은 자신들을 문명, 선, 자아, 이성으로, 반대로 흑인들을 야만, 악, 타자, 감성으로 간주한다.

디포는 프라이데이에게 유럽인적인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로빈슨 크루소가 주종관계에서나마 프라이데이와의 공존, 또는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야만인 또는 흑인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심화한다. 그리고 바로 이 혐오감과 두려움은 크루소에게, 그들이 자신을 공격해 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프라이데이의 존재는 자족적이지 못하고 전적으로 크루소에 의존한다. 예컨대, 크루소는 어느 날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을 통해 크루소는 섬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도와줄 하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로 이 때 프라이데이가 등장한다. 이처럼 프라이데이는 크루소가 섬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절한 시기에 크루소 앞에 나타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가 프라이데이를 만나는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문명’과 ‘야만’의 본질이 전경화된다. 가령 크루소는 프라이데이의 인육을 먹으려 하는 야만적 본능을 없애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새끼 염소를 죽인다.

심지어는 먹을 수도 없는 앵무새까지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인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인육을 먹으려 하는 프라이데이의 야만성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크루소의 야만성이 동반된다는 점이다. 즉, 크루소는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문명을 ‘야만인’에게 전파하려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명은 야만의 또 다른 이름이며, 타자를 정복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문명과 야만의 본질이 전경화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관계는 철저하게 주종관계이다. 둘의 주종관계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 사용에 잘 나타난다.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준 단어는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이고, 다음으로 “주인님”, “예”, “아니오”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만일 그들의 관계가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면 크루소는 프라이데이에게 “주인님”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또는 ‘친구’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어야 했다. 따라서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주종관계는 언어, 그것도 백인의 언어를 토대로 구축된 것이다.

쿳시의 <포>로 넘어가보자. <포>에서 프라이데이는 영어를 어느 정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디포의 프라이데이와는 달리, 혀가 잘려 있어 말을 하지 못한다.

외모 또한 디포의 프라이데이가 올리브색 피부를 하고 있지만 외모는 거의 유럽인에 가까운 반면, 쿳시의 프라이데이는 얼굴은 “납작하고” 눈은 “작고 흐릿하고” 코는 뭉툭하고“ 입술은 두껍다. 요컨대, 디포가 가급적이면 프라이데이를 유럽인에 ‘동화’시키려고 한 반면, 쿳시는 의도적으로 프라이데이를 유럽인과 ‘차별화’시키고 있다.

디포의 프라이데이는 유럽 문명을 전수 받을 정도로 지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크루소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영어를 배우고 급기야는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러나 쿳시의 프라이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니 할 수 없는 벙어리이다. 그것도 선천적인 벙어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혀가 잘려 말을 하지 못하는 ‘거세된 타자’다.

언어적 폭력에 노출된 인물

디포의 프라이데이가 크루소에게서 언어를 배운다고 해도, 그 언어는 어디까지 식민화의 수단이자 식민화의 과정으로서의 언어일 뿐이다. 즉, 그 언어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하인인지를 구별하는 ‘구별짓기’의 요소에 불과하다.

쿳시의 <포>에서 주목할 또 다른 인물은 수잔 바튼이다. 그녀는 백인 여성으로서 프라이데이와 마찬가지로 ‘타자’로 규정된다. 쿳시는 백인 여성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과 흑인 남성 프라이데이가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은, 각각 성과 인종이라는 범주적 차이만 있을 뿐, 둘 모두 근본적으로는 백인 남성에 의한 희생자임을 강조한다. 차이점이라면 수잔은 프라이데이와는 달리 강요된 침묵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잔 역시 자신의 무인도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서서히 자신이 이제까지 부정해오고 거부해 온 기존의 가부장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서구 담론을 내면화해간다. 따라서 본질적 측면에서는 수잔과 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제국주의의 공모자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프라이데이의 침묵이 단지 “무기력함”의 소산일까? 만약 쿳시가 프라이데이를 디포의 프라이데이와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자들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식민주의자들을 내면화하는 모습으로 그렸다면, 프라이데이는 수동적 타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쿳시는 프라이데이에게 가해진 성적 거세와 침묵이 식민주의자들의 폭력에 의한 것이지만, 그의 침묵이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오히려 프라이데이의 침묵을 적극적인 저항의 몸짓으로 파악한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