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인류문화의 젖줄이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 치고 강을 외면한 곳은 없다. 인류문화는 왜 강을 필요로 했을까. 첫째는 생활용수의 공급과 물고기 잡이에 있고 둘째는 강이 이룩한 퇴적 평야, 기름진 땅에 있으며 셋째는 강을 통해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강을 중심으로 한 인류문화는 역사시대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선사시대에는 무슨 고속도로가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류는 이동이 손쉬운 해안이나 강을 따라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산림이 울창하여 일일이 벌목을 하고 길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적도 물가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해 왔다.

충북지역에 유달리 선사유적이 많은 것은 소백과 차령산맥 사이를 남한강,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데다 석회암지대가 많아 많은 뼈 화석이 잘 보존된 덕택이다.

단양 금굴과 수양개 유적은 남한강가에 남아 있는 인류의 흔적이며 공주 석장리와 청원 두루봉 동굴은 금강과 금강 상류에 위치한 우리나라 대표적 구석기 유적이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며 강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강은 중요한 방어기능을 하였다. 성(城)주변으로는 적병의 침투를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두었는데 이를 해자(垓字)라 한다.

영화에 보면 적병의 침입 시 해자 사이로 들었다 내렸다 하는 통로를 내어 공격과 방어를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는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몽촌토성, 풍납토성은 한강 가에 쌓은 성이다. 적병의 침투를 한강이 우선 막아준 것이다.

청주 정북동 까치 내(鵲川)변에도 작은 토성이 있다. 바로 정북동 토성이다. 미호천의 길목을 차단하며 미호 평야를 경영하기 위해 쌓은 삼국 초기의 토성이다.

대개 큰 강을 사이에 두면 문화권이 달라진다. 중국의 양쯔강은 대륙을 화북(華北)과 화남(華南)으로 갈라놓았다. 한반도의 큰 강인 압록강, 한강, 금강, 낙동강은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한반도의 강은 문화권을 달리하면서도 종당에는 서로 닮아가는 충돌과 융합의 문화상을 갖고 있다. 한강과 낙동강의 문화는 금강에서 만난다. 금강은 두 문화권을 조율하며 또 나름대로 금강의 문화권을 숙성시켜 나갔다.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는 한강과 낙동강 문화권이 다소 다르다. 우리나라의 빗살토기는 이른바 서울 암사동 식이라는 가는 빗살토기와 부산 동삼동 식이라는 굵은 빗살토기로 대별되는데 충청도에서 발견되는 빗살토기에는 두 가지 형식이 함께 존재한다. 청원 북일면 일광삼존불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가 만나고 있으며 충주 봉황리 마애불에서도 두 문화가 조우한다. 즉 충남 북 지역은 북방의 문화와 남방의 문화가 접합하는 역사의 점이지대인 것이다. 화합하되 다 같은 것은 아니며(和而不同) 화합하되 함부로 휩쓸리지 않는(和而不流) 충청지역만의 정서와 아우름의 문화가 한강, 금강의 태토(胎土)속에 간직되어 있다.

신행정수도가 금강가인 공주~연기 지역으로 사실상 확정된 것은 충청지역의 이러한 역사성, 지정학적 위치 등이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로 풀이된다. 일찍이 한반도 문화의 균형을 잡았던 역사의 힘을 바탕으로 지역 간의 갈등을 비단강, 금강 줄기에서 비단 같은 마음으로 녹여보는 것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