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부가 출범한 지난해이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라면 아마도 ‘보수’와 ‘진보’가 아닐까 싶습니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약칭하는 이 두 단어는 1940년대 해방공간에서의 치열했던 좌우이념대립과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보수(保守)는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여, 사회 현상을 변혁하기보다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입장이나 태도’라 풀이하고있고 진보(進步)는 ‘인간의 정신 문명 역사 등이 시간을 따라서 더욱 완전한 상태로 진보한다고 하는 합리주의적 신념’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주의를 변혁, 혁신, 좌익, 이라는 등식으로 인식해 오고 있습니다. 나아가 진보주의는 일반적으로 친공, 친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형제쯤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와 달리 유럽에서는 정치적인 두 개의 축으로 보수와 진보대신 우파(Right)-좌파(Left)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보수(Conservative)-자유주의(Liveral)라는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좌우란 말은 1789년 프랑스혁명 뒤 국민공회(국회)의 의석 배치에서 가운데 의장석을 중심으로 오른 쪽에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앉고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왼쪽에 앉았던 데서 유래합니다. 그 이후 국제사회는 급진적인 정파를 좌파로, 보수적인 정파를 우파로 각각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해방과 6·25전후의 혼란기에 보수주의를 우익, 공산주의를 좌익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진보주의〓친공·친북, 좌익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그러기에 독재에 항거하는 진보적 민주세력이 꼼짝없이 친공 좌익으로 올가미를 썼고 진보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를 친북으로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국민들은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데 매우 부정적입니다. 그것이 왕조시대, 식민지, 독재정권을 거쳐오는 긴 세월에서 굳어진 경직된 정신문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유난히 강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지역, 빈부, 노사, 계층, 세대 등 온갖 분야에서 갈등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는 것도 실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기인되고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니 어찌 진보세력이 보수세력을 포용하고 보수세력이 진보세력을 포용할 수가 있을까.

진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보수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개혁이 왜 나쁩니까. 전통을 지키는 것이 왜 나쁩니까. 문제는 진보든 보수든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이 최상의 선이라는 아집과 독선에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본 고장인 유럽에서는 좌우가 번갈아 사이좋게 나라를 끌고 갑니다. 서로 상대를 존중하면서 경쟁을 통해 공생(共生)하는 ‘윈윈정치'로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점이 우리와 다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하늘을 납니다. 아무리 유능한 새라 할 지라도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지 못합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쪽 팔로는 제대로 무엇을 하지 못합니다. 왼팔, 오른 팔이 함께 조화롭게 움직일 때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새에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팔이 있는 것은 서로의 역할에 따라 힘을 합치라는 조물주의 오묘한 뜻인 것입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되 공생의 개념이지 타도의 대상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버려야 할 것은 극단론입니다. 극우도 문제려니와 극좌도 문제입니다. 극단적 보수나 극단적 진보나 해악이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보수와 진보는 상호 보완적이며, 사회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조화를 이룰 때 국가 사회는 안정을 찾고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입으로는 상생(相生)을 떠들면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과 아집이 나라를 이 꼴로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로 내가 극우? 극좌? 는 아닌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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