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혜정 충북도 여성정책관

▲ 변혜정 충북도 여성정책관
업무 중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나름 개발한 소소한 즐거움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사고팝니다”의 내부 게시판을 클릭하는 재미가 크다. 복숭아, 포도, 호박고구마 등 제철 먹을거리나 드물지만 중고차나 노트북도 소개된다. 과거에는 홈페이지에 이러한 게시판이 있다는 것을 몰랐지만 알았을 때도 사고 싶은 마음과 달리 가지고 올라갈 형편이 되지 않아 침만 삼키며 포기했다. 그러나 나른한 오후에 모 직원의 어머니가 농사지었다는 소소한 소식과 함께 탐스러운 과일 사진이 올라오면 일단 사고 싶은 마음에 잠시 스트레스를 잊는다.

이번에 게시판에 올라온 것은 땅콩이었다. 남편이 땅콩을 즐겨먹기도 하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아침 식사대용이다. 5킬로에 삼 만원이라는 가격도 저렴했지만 정성껏 올린 내용이 유혹적이다. 5킬로가 어떤 정도인지 가름할 수 없었지만 2만원에 한 봉지를 구입해본 적이 있어 3만원어치 땅콩은 가지고 갈만하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배달된 땅콩 5킬로는 너무도 많았다. 필자가 대중교통으로 배달하기에 덩치가 컸다. 그러나 스스로 깐 맛있는 땅콩을 먹을 생각에 일단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런데 땅콩을 까는 일이 큰 문제였다. 더구나 껍질을 까서 먹어 본 땅콩은 예상한 맛이 아니었다. 덜컥 겁부터 났다. 누가 어떻게 까서 어떻게 먹을 것인가? 놀라서 쳐다보는 남편과 아들에게 다짜고짜로 배분했다. 그러나 땅콩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은 이내 약속 있다며 나간다. 아들보다 조금 양심이 있는, 땅콩을 아주 좋아하는 남편은 왜 이런 것을 사왔는지부터 볼멘소리를 한다. 마트에서 편하게 사서 먹을 수 있는 것을 괜히 고생한다는 것이다.

일단 스스로 일해 얻은 결과물을 먹는 것은 더 맛있을 것이라 설득했다. 그러나 땅콩껍질을 부수고 땅콩을 꺼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정월 대보름날, 땅콩이나 호두 몇 개 까는 것 외에는 일한 경험이 없는 도시 사람인 남편과 필자는, 허리도 아프고 손가락에 물집도 잡혀 2시간 일하다가 포기했다.

둘째 날은 첫 날보다 나아졌지만 2명이 밤새 일했는데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실은 땅콩먼지와 껍데기로 어수선했다. 셋째 날인 일요일에는 남편과 필자 둘 다 약속이 있었다. 남은 땅콩을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임자를 수소문해 봤지만 다 거절당했다. 생각해보니 주중에 집에서 여유있게 땅콩을 깔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집안일에 대해 성찰하면서 땅콩 까고 있다.” 남편의 카톡 문자는 25년만의 최초의 진실 된 고백이었다. 주말부부가 된 2년간 남편은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계절 옷, 이불교환이나 대청소, 집안 대소사 챙기기 등은 여전히 필자의 몫이지만 세탁소 옷 관리, 음식물 쓰레기 비우기, 간단한 식사 해결하기 등은 새롭게 남편이 책임져야 할 집안일이다. 그런데 부인이 사온 땅콩까지 황금연휴 밤마다 까야 했으니 아마도 그 긴 밤 남편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말부부 2년간 확실하게 얻은 소득이 있다. 집안일이 너무 많아 일하는 여성은 너무 힘들겠다는 남편의 성찰이다. 왜 여성들이 ‘집에 있는 사람’이 되는지, 또 여성들이 ‘집사람’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는지, 앞으로 부인을 집사람으로 부르지 말아야 한단다. 그래서인지 딸아이에게는 확실한 지위를 갖기 전에는 결혼해서 집사람이 되는 일이 없도록 신신당부한다. 그런데 땅콩을 까면서 남편과 필자는 또 다른 진실을 알았다. 우리들이 쉽게 먹고 소비하는 농산물이 큰 수고와 정성아래에서 수확되는데도 그 가격이 너무 저렴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땅콩 이야기를 들은 팀장이 하는 말, “깨끗하게 씻어 삶아 먹으면 볶은 땅콩보다 더 고소한데… 손버리는데 누가 그것을 그렇게 까요?” 아뿔싸! 이렇게 많은 것을 몰랐다니…. ‘도시사람’으로, 그리고 ‘일하는 여성’으로 너무도 많은 것을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았다는 사실이 정말로 창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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