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종 수 (연세대 교수 행정학 )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필자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81년의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해 2월의 서울행은 태어나서 세 번째로 서울 땅을 밟아보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남산과 어린이공원으로 왔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대학을 다니던 사촌누나가 학교구경을 시켜준 일이 전부였다.

낯선 서울거리를 오가던 필자의 눈에 신기한 현상들이 몇 가지 관찰되었다. 웬만한 지하수만 나타나면 사람들은 ‘약수’라고 호들갑을 떨며 줄을 섰다. 초정약수에 비하면, 빗물 수준에도 못미치는 물이었다. 또 거리에 그리도 많은 가게들이 제각각 아무 장사를 하고도 먹고살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고단하게 일하며 간신히 생활해 갈 수 있던 농촌 출신의 필자에게 그것은 신기한 현상이었다. 아무집이나 아무 간판만 걸어놓으면 장사가 되고, 그래서 먹고 살 수 있게 되는 대도시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필자의 눈에 들어오는 이상현상은 공동체의 붕괴였다. 대부분 자기 가정 하나 돌볼 정도의 여유와 관심밖에는 없었다. 특히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일수록 이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려니, 프라이버시의 보호려니 하던 필자에게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을 하면서였다. 우리가 오랫동안 자연친화적이라느니, 효(孝)의 문화가 살아있다느니, 공동체 중심적이니 하는 말로 한국사회를 특징지워 왔지만, 정작 오늘의 현실은 서구 사회보다도 그런 특징을 더 상실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원에 앉아있으면 새들이 무릎에까지 날아와 앉았고, 평화롭게 산책하는 노인들을 보며 한국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떠올랐다. 제도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도 공동체 지향적인 면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이웃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불우어린이 돕기에 쏟아지는 천문학적 성금, 장애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관심 등에서 그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들 한국 사람들보다 더 선량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 과정에서의 관심과 노력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는 1991년 지방자치 제도를 부활시킨 바 있다. 지방자치는 ‘지방’과 ‘자캄의 합성어이다. 지방이 중앙으로부터의 분권화를 의미한다면, 자치는 지역사회로부터의 공동체 발전을 의미한다. 크게 보아 지방자치는 공동체 회복운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개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1991년 이후의 우리나라 지방자치 행로를 평가해 보자면, ‘지방’은 성공했으나 ‘자캄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정수준 분권화는 진전되고 있으나, 주민참여와 자치, 그리고 이것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공동체의 회복은 21세기를 열어가야 하는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에 해당한다. 공동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사회규범도, 삶의 질도,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어렵다. 이것이 요즈음 얘기하는 사회자본이론(social capital theory)의 핵심이다. Max Weber나 Fukuyama, 심지어는 그 옛날 공자께서 말씀하셨던 가장 중요한 가치도 바로 공동체의 회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은 공동체의 파괴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의 압제와 급속한 산업화, 6.25동란, 중앙집권적 정치행정 체제를 거치면서 우리의 좋은 장점을 많이 잃어버렸다. 농촌은 농촌대로 온전한 동네의 기능을 잃어버렸고, 도시는 도시대로 지역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농촌의 전통적 공동체는 이미 삶의 공간으로서의 온전한 기능을 잃고 붕괴되었으며, 도시는 도시대로 더불어 사는 마을을 형성하지 못한 채 21세기 사이버 공동체로 직행한다고 법석을 떠는 형국이다.

공동체 회복의 노력 없이 한국이 21세기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동네라는 공동체가 활성화, 인간화 되지 않고서는 경제성장도 삶의 질 개선도 어렵다. 국가 안에 동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안에 국가도 있고 경제도 있다. 단체장과 지방의원, 그리고 학자들은 공동체 회복을 선창하고, 지역주민들은 참여로 화답하여 공동체 회복운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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