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에게 문학적 영감 준 초서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⑧

윤정용 평론가

<베어울프>는 영웅서사시이다. <베어울프>는 민간에서 구전되다가 대략 8세기 경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웃 덴마크 왕국에 괴물 그렌델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기트족의 베오울프는 뛰어난 영웅적 기개로 괴물을 퇴치한 후 본국으로 귀환한다. 베오울프는 기트족의 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던 중 무서운 용의 갑작스런 침입을 받게 되자 목숨을 바쳐 용과 싸우다 용을 죽이고 그 자신도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베어울프>는 황량한 자연을 배경으로 기개 높은 무용 정신과 군신의 애정을 묘사한 장시로서 게르만 정신의 전형을 나타낸다. <베어울프>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기본적으로 북유럽의 ‘이교주의’(paganism)지만, 또한 이교주의와 기독교 사상의 합류도 암시된다. <베어울프>는 비록 영국의 영웅설화는 아니지만 고대 영어로 쓰인 고대 영문학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구조와 가치관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역사의 보고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베어울프>가 문학작품으로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교도적인 영웅주의 도덕관과 기독교적인 도덕관을 절묘하게 혼합시킨 시인의 뛰어난 문학적 독창성에 기인한다.

고대 영국과 중세 영국을 구분하는 계기를 제공해준 가장 중요한 사건은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 1066)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에 속해 있던 영국은 ‘노르만 정복’을 계기로 프랑스의 밝고 화려한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갔기 때문이다. 노르만 정복이 영문학에 끼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노르만 정복과 영문학

무엇보다도 ‘언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실제로 고대 영어는 게르만 계통의 언어로서 현대 영어와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반면, 노르만 정복 이후 변화하기 시작한 중세 영어는 제프리 초서의 작품에서 보듯이 현대 영어에 가깝다. 그 다음으로 게르만의 어둡고 숙명론적인 문화에서 밝고 화려한 문화로의 전이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기독교 사회의 완성을 들 수 있다. 노르만 정복은 영국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사회적·제도적으로 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실제로 기독교로의 개종 후 영국에는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를 위한 물리적 기반인 장원제도와 기사제도가 확립된다. 요컨대, 노르만 정복을 계기로 영국은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사회가 확립되고 경제적·정치적으로는 봉건제를 갖추게 된다.

중세 영국은 한 마디로 격동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치렀고, 국내적으로는 흑사병이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농민 반란도 일어났다. 반면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중간 계층이 급격히 증가했다. 중세 영문학을 대표하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문학적 성취는 무엇보다도 이렇게 급변하는 중세 사회의 역동성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근대적인 이야기 형식을 발달시킨데 있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캔터베리 대성당을 참배하는 사회 각층의 대표 31명의 순례자들이 런던 템스 강변의 한 여관에서 여관 주인의 제안으로 돌아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기사와 그의 종자인 수습기사, 수녀원장, 변호, 시골 사제, 탁발수사, 면죄사, 의사, 대학생, 선장, 상인, 요리사 등 당시 영국 사회를 대표하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 1944년 영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켄터베리 이야기>.


31명 순례자의 이야기

<캔터베리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이야기 내용에 화자의 성격이 드러난다. 화자는 개별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당시의 직업을 대표하기도 한다. 즉,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각각의 화자는 ‘대표단수’인 셈이다. 더 나아가 초서는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상호관계에도 주목하는데, 이는 곧 <캔터베리 이야기>의 각 에피소드가 개별적으로 독립성과 완결성을 갖춘 이야기인 동시에, 화자들의 순례이야기 모음집이라는 중층적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중세 판본이 80개에 이를 정도로 초서 당대에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또한 초서가 그린 캔터베리의 이야기와 그 인물 군상이 오늘날까지 차용, 번안, 개작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캔터베리 이야기>는 단지 14세기 런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보편성을 갖는다고 말 할 수 있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원형이 가장 빈번하게 재현되는 분야는 역시 공연과 영화다. 영화 쪽으로 살펴보면, 마이클 파렐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캔터베리로 가는 일행의 이야기로 <캔터베리 이야기>를 각색했다.

그러나 보다 유명한 <캔터베리 이야기>의 창조적 변형의 사례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캔터베리 이야기>(1971)다. 파졸리니는 각본과 감독을 맡아 영국에서 촬영했고, 그 자신이 영화 속에 초서 역을 맡아 중간 중간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 작품으로 파졸리니는 베를린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파졸리니에 의해 밝고 따뜻한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는 노골적인 성적·정치적 담론으로 탈바꿈했다.

파졸리니의 영화는 반문명적인 것, 반사회적인 것, 그리고 비도덕적인 것에 대한 연민과 동경을 표출하며,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 기존의 전통이나 금기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캔터베리 이야기>를 포함해, <아라비안 나이트>(1974), <살로 또는 소돔의 120일>(1975)과 같은 그의 후기 작품들은 마치 잔인함을 동반한 가학성과 피학성에 관한 보고서로 읽혀질 수도 있다. 파졸리니는 자신의 후기 작품들을 통해 이탈리아 사회에 유령처럼 맴도는 파시즘의 잔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견지했다.

즉, 그는 자신의 영화를 예술 작품으로서만 국한시키지 않고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도구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파졸리니를 통해 중세의 민중 생활 보고서 <캔터베리 이야기>는 그 궤도가 정치적 텍스트로까지 확장되었다.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도 있다. 데이빗 핀처는 한 인터뷰에서 단테의 <신곡>과 <캔터베리 이야기>중 「본당 신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죄악을 모티프로 영화 <세븐>(1995)을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해럴드 블룸은 <서구의 정전>에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서양의 정전을 이루는 스물 여섯 명의 작가를 꼽았고, 그 중 ‘서구의 정전’의 중심을 셰익스피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셰익스피어를 제외하면 초서가 영어권 작가 중 가장 으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초서는 셰익스피어만큼 영문학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초서의 가장 뛰어난 문학적 성과는 등장인물의 생생한 ‘성격화’에 있고, 바로 이 점은 셰익스피어에게 계승, 발전된다.

따라서 영국 문학에 <캔터베리 이야기>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출발점이며, 가장 위대한 셰익스피어에게 문학적 영감을 준 초서가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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