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관계> 프랑스 귀족사회 꼬집는 풍속소설…영화에선 다양한 해석

영화를 통해 문학 읽기⑦ 영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윤정용 평론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쨌든 간에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는 생각에 크게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전, 즉 앙시앵 레짐의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결혼은 대부분 정략적이었고, 결혼 후엔 불륜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기다렸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은 불합리한 것이며,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그들은 사교계에서 웃음거리로 전락될 수 있었기에 사랑의 감정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졌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1782)는 세태소설 또는 풍속소설로서 앙시앵 레짐의 프랑스 귀족 사회의 퇴폐적 행태를 생생하게 묘파했다. 주인공 메르테유 후작 부인은 당대의 간계의 명수로서, 추정컨대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지녔지만 양심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남자들을 유혹한 뒤 파멸시킨다.

이런 그녀에게 필적할 만한 유일한 인물은 바로 발몽 자작이다. 발몽 역시 후작부인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믿지 않기에 수많은 여인들을 유혹한 뒤 파멸시킨다. 때문에 발몽은 후작 부인에게 최고의 경쟁자이자 최상의 파트너인 셈이다.

사랑은 일종의 게임

▲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2003 감독 이재용 출연 배용준, 이미숙, 전도연, 조현재
메르테유 후작 부인은 자신의 수많은 옛 애인 중 한 명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녀는 그의 장래 신부인 순진한 세실의 순결을 빼앗고 결혼 첫날밤을 맞이하게 해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이 음모를 발몽에게 제안한다. 발몽은 음모가 성공할 시에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는 조건부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발몽 역시 시시한 처녀들을 유혹하는데 싫증이 난 상태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정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여인을 정복하고 가차 없이 차버리는 것이다.

그러던 중 미덕을 갖춘 투르벨 부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메르테유 후작 부인이나 그가 알고 있던 여느 귀부인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인이다. 발몽은 끊임없이 투르벨 부인에게 구해하고, 그녀는 그의 구애를 계속해서 거절한다.

하지만 그녀는 발몽을 마음속에 두기 시작한다. 투르벨 부인은 발몽에 대한 사랑과 정숙한 부인의 몸가짐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투르벨 부인이 양심의 가책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에도 발몽은 세실과 연애를 즐긴다. 마침내 투르벨 부인은 발몽의 끈질긴 구애에 굴복하고 만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다. 메리테유 후작부인과 발몽의 경우 남녀관계는 ‘게임’이었지만 투르벨 부인에게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발몽과 사랑에 빠진다. 발몽 역시 승리에 도취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만다.

발몽의 투르벨 부인과의 애정 행각으로 그와 메르테유 후작부인 사이의 파트너십은 결국 끝나고 만다. 메르테유 후작 부인은 발몽이 자제력을 상실해 투르벨 부인을 ‘진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아니 격분한다. 메르테유 부인이 화가 난 이유는 둘 사이를 질투하기보다는 발몽이 감정을 드러내는 약점을 보였기 때문이다.

발몽의 감정의 노출은 후작 부인을 격노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마침내 그를 파멸시키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결투가 벌어져 발몽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투르벨 부인 역시 실연 뒤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죽는다. 세실은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메르테유 부인은 전 재산을 잃을 뿐 아니라 병에 걸려 아름다움마저 잃고 만다.

<위험한 관계>에서 발몽 자작은 정말로 투르벨 부인을 사랑한 것일까, 그리고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질문을 하게 된다. 발몽은 투르벨 부인을 유혹하고자 하는 자신의 감정에 휘말려 격정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쾌락에 빠지고 만 것이다.

따라서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투르벨 부인이라기보다는, 그녀에게 느낀 격정이라는 자신의 감정인 셈이다. 그런데 격정과 격정의 대상을 완전히 분리하는 게 가능할까, 라는 또 다른 질문을 하게 한다.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또 하나 발몽과 메르테유 부인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둘의 관계는 단지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일 뿐일까. 아니면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해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잔느 모로와 제라르 필립을 주연으로 한 프랑스 판 <위험한 관계>(1959), 밀로스 포먼의 <발몽>(1989), 스티븐 프리어스의 <위험한 관계>(1988)등이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1990년대 후반의 미국으로 설정된 라이언 필립과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1999)도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최근에 허진호 감독이 장동건, 장백지, 장쯔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동명의 영화 <위험한 관계>(2012)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이 남는 영화는 역시 이재용 감독이 연출하고 이미숙, 배용준, 전도연 등이 출연한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이하 스캔들>(2003)다. 영화적 완성도를 떠나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을 어떻게 변용하는지를 살펴보는데 좋은 텍스트로 기능한다.

<위험한 관계>는 퇴폐적인 18세기 프랑스의 귀족 사회를, <스캔들>은 이와 시기적으로는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크게 다른 엄숙한 조선 사회를 다루고 있기에, 표면상 두 작품을 시간적·공간적으로 이어줄 매개체는 마땅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은 원작의 서간체 소설의 형식과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여지는 <조씨 추문록>을 병치시켜, 마치 영화 <스캔들>이 <조씨 추문록>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장치하고 있다. 물론 이는 허구다.

<위험한 관계>에서는 악녀 메르테유 부인은 사랑도 잃고 돈도 잃고 자신도 잃는다. 즉 원작소설에서는 인과응보의 교훈을 역설하는 듯하다. 반면에 <스캔들>에서는 남녀 주인공은 죽고 악녀인 듯한(?) 조씨 부인(이미숙 분)만이 살아남아 마지막에 배를 타고 청나라로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배 안에서 연인이 준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자 꽃잎을 잡으려는 손짓과 이를 따라가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아련하고 처연하다.

즉 감독은 조씨 부인을 처단해야 할 ‘절대 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지녔지만 능력을 펼칠 수 없기에, 그녀의 사랑을 이룰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악행(?)을 벌인 그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더욱 더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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