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문장 덕에 쉽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

박순원 시인

정말 재미있게 잘 읽히는 소설이다. 나는 작가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인연으로 이 책을 선물 받는 행운을 누렸다. 받은 날 저녁 앞에 몇 장을 떠들어봐야겠다고 시작한 것이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읽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하게 진행될 뿐 아니라 문체도 경쾌하고 날렵하다. 장면이나 심리에 대한 묘사도 감칠맛이 나게 펼쳐진다. 작가 특유의 걸출한 입담이 가히 물이 올랐다고나 해야 할까 ……. 그러나 결코 가볍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2009년에 시작한 소설을 2014년 여름에 마무리했다. 6년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동안 담양 ‘글을 낳는 집’, 서울 연희동 ‘연희문학창작촌’, 무주의 ‘일성콘도’, 광주 봉선시장 뒤 상하방, 조선대 앞 캠퍼스 고시원, 원주시 외곽의 ‘황골 모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근교의 아파트 등을 전전했다. 정말 오랜 시간과 많은 공간을 헤맨 셈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1부는 빨리 썼으나, 2부와 3부는 그렇지 못했다. 소설을 쓸 땐 왜 이렇게 안 풀리지,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마, 빨리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고통스럽고 슬픈 이야기이다. 작가는 견디기 힘든 분노와 슬픔 속에서도 태생적 ‘이야기꾼’의 어조와 호흡을 잃지 않는다. 책 뒤표지에 실린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옮겨본다.

“어떤 사람에게 역사는 그저 저만치 지나가는 행인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협잡꾼이고 폭력배이며 살인마다. 1980년 9월 1일, 육군 소장 전두환이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후 경찰과 검찰은 출세를 위한 과잉 충성의 열기 속에서 전국적으로 ‘빨갱이 만들기’에 나섰다.

▲ 제목: 차남들의 세계사 지은이: 이기호 출판사: 민음사
1981년 6월의 학림(서울)·부림(부산)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 용공 조작의 광기를 강원도 원주도 피해 갈 수 없었다. 1982년 3월 18일에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한 문부식과 김은숙은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만나기 위해 원주에 왔고 4월 1일에 자수했는데, 수사 당국은 외려 관련자들을 찾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피의 보복에 나섰다.

원주가 고향인 이기호는 당시 겨우 열 살 남짓의 소년이었지만, 그로부터 이십수 년 후에 그가 성실히 조사하고 간곡히 상상하여 썼을 이 소설은 그 광기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삶과 꿈이 어떤 식으로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말하자면 어느 피의자가 자신의 죄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온갖 착오와 거짓말과 부조리가 엉키는 와중에 결국 죄인이 되고 마는, 밀란 쿤데라(『소설의 기술』)였다면 카프카적인(Kafkaesque) 악몽이라고 했을 법한 이야기다. 이런 무거운 소재 앞에서도 '이야기꾼'의 어조와 호흡을 절묘하게 운용하면서 시종 ‘희비극적’이라고 해야 할 어떤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기호 소설의 특징이다. 작가라면 비극적 감상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럽게 웃어야(웃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윤리적 준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이 소설을 끝까지 웃으면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후반부의 착잡한 진실 앞에서는 견디기 힘든 분노와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에서는 많이 웃은 만큼 결국 더 아파지기 때문에 희극조차 이미 비극의 한 부분이다. 쉽게 읽히지만 빨리 덮기 어려운, 깊이 상처 입은 사람의 쓸쓸한 농담 같은 소설이다.”

신형철의 말대로 “원주가 고향인 이기호는 당시 겨우 열 살 남짓의 소년이었지만”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고, 대학생이었다. 장면 하나하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내 곁을 스쳐지나갔던 것들이다. 작가의 ‘성실한 조사와 간곡한 상상’은 너무나 핍진하게 그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그 시절을 현실로 살았던 나 자신이 스스로 몹시 부끄러울 뿐이다. 이 소설을 또 묻는다. 이것이 과연 지나간 이야기인가? 그 시절이 남긴 깊은 상처는 과연 치유되었는가? 정말 쉽게 읽히지만 빨리 덮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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