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이 필독해야 할 책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권희돈 문학평론가

영화 <변호인>에서 검찰은 13권의 책을 불온서적이라 압수하여 검찰 측 증거물로 제시한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그중 하나이다. 이 책이 불온서적인 까닭은 저자가 공산주의자이고 유물사관에 입각해 기술된 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송우석 변호사가 반박한다. 저자는 영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소련에 체류했을 뿐이고, 영국이 자랑스러워 하는 학자이므로 대한민국에서도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는 답변서를 낭독한다. 그리고 서울대학 필독권장도서임을 강조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영화의 분위기는 하이라이트에 오른다.

영화에서 빠뜨린 게 있다. 과연 이 책이 유물사관에 근거하여 기술한 책인가 하는 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아니올시다 이다. 사실을 중시하는 19세기의 역사 기술과 역사가의 해석을 중시하는 20세기 역사 기술의 한계를 각각 지적한 다음, 사실과 해석을 융합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그는 자신의 역사철학을 요약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의 결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저자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유물사관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과 해석의 종합 그리고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를 피력한 역사철학서이다. 그러므로 영화에서처럼 이 책이 불온문서 운운 하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이다.

▲ 제목: 역사란 무엇인가 지은이: E. H. 카 옮긴이: 김택현 출판사: 까치
필자가 이 책을 손에 쥔 것은 영화 속의 젊은이가 고초를 겪던 80년대 초였다. 그 때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면서 소설을 연구하는 문학도였다. 이 책을 읽고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역사서가 우리에게 너무 일찍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군사파시스트와 싸워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 비하면 요원한 역사인식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양립할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해야 우리 사회가 진화할 것이며, 이렇게 통합된 남한 사회와 주체사상을 가진 북한 사회가 대화 관계를 유지할 때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바로 읽어야 할 책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현상을 마주하면서는 너무도 앞선 그의 관점이 부럽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였지만, 문학도로서 접하는 그의 종합적이면서 균형잡힌 관점은 꼭 필요한 자양분이었다. 무엇보다 올바른 관점으로 문학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척도를 마련해주었다.

소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확고한 정신적 준거틀을 얻은 셈이다. 이는 필자가 선택한 문학이론인 <수용미학>과 대상을 인식하는 태도가 완벽한 일치를 이루었다. 그에게서 받은 균형감각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되고 나서도 편협주의와 관념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 만사는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때 어부가 그물을 치고 거두는 때, 그 때를 놓치면 농사는 망하고 어부는 고기를 놓친다. 최근에 우리는 민주화를 이루어 의회민주주의를 30여년 해 왔지만 공공청사의 건물만 높이 세웠고, 산업화에 성공을 거두었다지만 대기업의 덩치만 키워왔다. 민주화 세력은 분열로 힘을 잃었고, 산업화세력은 타락하여 힘을 잃었다.

이에 대한 냉철한 반성의 바탕 위에서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E. H. 카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과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니 개인과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통섭의 사회를 창조해 가야 할 것이며,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니 과거를 과거로 보지 말고 현재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명제를 성찰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슴 설레이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우리 역사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동학혁명 정신이었다. 그 혁명은 미완으로 끝난 혁명이 아니라 3.1만세운동, 4.19학생혁명, 5.18광주시민혁명, 6.10민중항쟁으로 면면이 이어져 온 진행형의 혁명이며 우리민족이 분단모순을 온전히 극복할 때 완료형의 혁명이 된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서울대학의 필독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나라 전 국민의 필독서로 선포해야 할 까닭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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