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혜정 충청북도 여성정책관

▲ 변혜정 충청북도 여성정책관
나눔 예찬론자인 딸아이는 방학이 되면 집에서 잠자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여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한다. 이번에도 벌써 10박스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필자에게 마트에 가서 아이쇼핑하면서 물건을 구매하는 습관을 고치라고 지적한다. 별로 필요하지 않는 물건을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죄악이란다. 그러면서 봉사 특히 ‘나눔 봉사’에 신경 쓰지 않는 필자를 비난한다.

2주일에 한 번씩 마트에 가는 필자가 쇼핑목록에 없는 물건을 사거나 살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도 못해 같은 물건을 몇 개씩 사기는 한다. 이러한 필자를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필자도 나름 이유는 있다. 바쁘게 일에 열중하다보면 집안 살림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딸아이의 지적에 뜨끔했지만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필자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을 한다는 핑계아래 ‘나눔 봉사’ 등에 신경 쓰지 않다거나 ‘일중독’이라는 지적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며칠간 고민하다가 성평등을 위해 헌신하는 선배에게 하소연했다. 선배는 나눔이나 성평등 둘 다 쉽지 않는 일이지만 성평등도 사전적 의미에서 봉사란다. 또 ‘나눔 봉사는 할수록 칭찬받지만 성평등 봉사는 할수록 욕 먹는다’며 나눔 봉사가 더 쉬운 일이라고 일축했다.

‘받들면서 섬기다’는 봉사(奉仕)라는 한자적 의미 또는 ‘국가와 사회, 타인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고려할 때 성평등 사업들도 딸아이가 주장하는 봉사의 하나이다. 그런데도 왜 나눔 봉사는 할수록 아름답다고 칭찬받지만 성평등 봉사는 할수록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는 것일까? 또 아무리 옳아도 대중의 설득을 얻지 못하다면 실패한 것일까? 설득의 중요요소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 중 성평등 설득은 무엇을 갖추지 못한 것인가?

정의와 평등은 인간 삶의 근본 원칙이다. 너무도 당연한 명제지만 ‘성평등’은 로고스(논리)가 있어도 정서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워한다. 성역할이나 통념이 문화적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성별이란 자연의 순리’로 믿는다. 특히 남성들 뿐 아니라 여성들까지도 믿기 때문에 변화가 어렵다. 일단 여성들의 파토스(감정)를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뿐 만 아니라 성평등을 주장하는 주체들이 다수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들이 존경하는 인격, 성품, 행동 등 에토스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평등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성평등은 ‘지금 여기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조정하여 서로 이해하는 것 ‘이상’이다. 현재의 성별 상황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에게 나눔 봉사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물론 나눔 봉사도 서서히 사회를 변화시키겠지만 성평등 봉사는 지금 여기의 이 사회의 변화의 주체가 되자는 지점에서 좀 더 급진적이고 근본적이다. 그래서인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변화시키려는 성평등 봉사의 주체들은 때로는 독불장군, 마녀, 이기적인 존재로 비난받기도 했다. 일단 ‘여성들이 선망하는 여성들’이 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지금 여기’의 여성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거나 성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뼈아픈 지적이다. 혹 그들이 다르기보다 부족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선망하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하는 ‘엘리트 슈퍼 여성’만이 대중을 설득하는 에토스와 파토스를 갖는다면 이것은 너무 비극이다. 만약 사회에서 칭찬받고 이미 인정받는 방식만이 사회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성평등 봉사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미래를 위해 함께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분 좋은’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물론 딸아이도 설득하지 못한 필자도, 깊이 반성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 방법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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