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데 이어 ‘유네스코/직지상’이 제정됨으로써 청주의 직지는 세계의 직지로 달음박질하고 있다. 이제 ‘직지’가 청주 역사 정체성의 핵심이고 간판 문화 유산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직지와 금속활자를 혼돈하여 ‘직지’하면 곧 금속활자와 등식(等式)을 만들기 일쑤이니 고정관념에 대한 함몰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직지와 금속활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만 존재의 이유는 각기 다르다.

직지(直指)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줄인 말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직지란 경한(景閑)스님 이전에도 불가에서 널리 쓰인 법구(法句)다.

호가 백운(白雲)인 경한 스님은 고려 충렬왕 24년(1298)전라도 고부에서 태어났다. 경한은 원나라 석옥청공화상을 찾아 임제종(선종계열의 종파)을 전수 받았고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경한이 석옥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석옥이 경한에게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 1권을 주었다. 경한은 귀국하여 75세 되던해 스승이 준 책에서 가장 요긴한 내용을 추리고 일부는 증보하여 상,하권 2권으로 재편집하였는데 이게 바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이세열 역, 직지)

한편 금속활자는 이와는 별도의 라인에서 발달해 왔다. 1234년에 이미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을 인쇄하였고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등도 그 후에 발간되었다.

이러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하이테크가 고려 우왕 3년(1377)청주목 흥덕사에서 ‘직지’와 그 위대한 만남을 가진 것이니 이 만남을 역사의 필연이라고 해야 할지,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안 된다.다만 몽고 침략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변방 사찰의 인쇄술을 자극한데다 청주가 역사의 고도이자 학문의 고장이니 필연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직지’하면 곧바로 백운화상과 금속활자가 연상되나 실상 백운화상은 직지가 금속활자로 간행되기 3년전에 입적하였다. 직지를 금속활자로 간행한 당사자는 백운화상의 제자 석찬, 달담이었다. 이외에도 이름 모를 장인(匠人)들이 무수히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활자본의 탄생에는 쇠 다루기, 종이생산, 우수한 먹, 제본술 등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또 한사람의 공로자는 다름 아닌 비구니 묘덕(妙德)이다. 여자로서 그 출판비를 다 대었으니 여걸이 아닐 수 없다. 스폰서가 될 정도였다면 불심 깊은 상당한 재력가다. 그의 정체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학계에서는 충선왕의 사위 정안군의 후실 임씨(任氏)로 보고 있다.

이로 보아 직지의 주인공은 딱히 한 사람으로 정할 수 없다. 백운화상이 없었더라면 오늘까지 전해지는 ‘직지’ 책이 없었을 테이고 석찬, 달담이 없었더라면 금속활자본 ‘직지’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직지에 있어 누구는 주연이고 누구는 조연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역사의 무대란 이런 복합성 속에서 구성되고 발전되는 사례가 많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혼자서 쌓은 게 아니라 진시황 때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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