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제임스 길리건의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김미경
전 청주YWCA 여성종합상담소장, 현 캐나다거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자격지심 많은 사람들인지 외국에 나와보면 금방 안다. 한 친구가 말하기를 자기가 영어를 못한다고 마트 점원조차 대놓고 무시한단다. 왜 그렇게 느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물건값 70.25불을 계산하기 위해 20불짜리 지폐 네 장을 낸 다음 25센트 동전 하나를 내밀었더니 온갖 인상을 다 쓰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자기를 대했다는 것이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계산이 복잡해서 인상 쓴 거 아니냐 했더니 갸우뚱 한다. 캐나다의 상점 계산대에서 일하는 점원들은 대부분 암산을 못한다. 계산대의 컴퓨터가 거스름돈 9.75불을 표시하고 있는데 손님이 뒤늦게 25센트를 내민 경우 즉각 10불 지폐를 되돌려 줄줄 아는 점원은 드물다.

게다가 한국사람들은 점원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눈을 마주치는 건 물론이거니와 내가 잔돈을 지불해도 되겠니? 하고 자신의 요구를 설명하는데 익숙하지 않아 앞 뒤 없이 불쑥 동전을 내밀기 일쑤다. 점원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되돌아온 점원의 표정에 대해 우리는 미안함이나 의아함이 아니라 수치심을 느낀다. '이게 날 무시해?'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은 외국생활에서 사소한 당황스런 일을 겪은 날엔 여지없이 부끄러운 과거의 어느 사건을 되새기는 꿈을 꾸곤 하는 나와 참 닮았다. 우린 왜 이리도 수치심에 익숙한 것일까?

우리 사회는 경쟁과 불평등, 서열주의에 익숙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교당하면서 산다. 아동 청소년기의 교육은 극단적으로 서열화되고 일등과 이등 이하가 구분된다. 일정 사이즈의 기준을 벗어난 몸매, 미의 기준을 벗어난 외모, 대학 못 간 것, 벌이가 시원치 않은 것, 아파트 평수가 작은 것 등 인생살이에서 비교와 수치심은 너무나도 익숙한 감정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오랜 기간 감옥 수감자들의 폭력과 자살을 줄일 방법을 연구해 온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의 저자 제임스 길리건은 수치심이 폭력과 자살을 일으키는 절대적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해로운 정치인, 덜 해로운 정치인

▲ 제목: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지은이: 제임스 길리건 옮긴이: 이희재 출판사: 교양인
그는 이 책 첫 장에서 보수가 집권하면 자살과 살인이 급증한다는 단순 명쾌한 결론을 먼저 보여준다. 미국공화당은 불평등과 분리주의와 수치심에 기반한 권력이고 민주당은 최소한 평등과 기회의 균등에 기반하려 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란다.

즉 범죄와 자살은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보통의 연구자가 작성한 보고서라면 수치심과 불평등의 심리적 영향을 충분히 설명하고 나서야 시사점이 있다는 둥 오차범위는 어떻다는 둥의 안전장치와 함께 슬며시 이런 그래프를 내밀 텐데 말이다.

그러나 우직한 의학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를 확신한 순간 망설임 없이 정치적 발언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실직이 얼마나 수치심을 극대화 시키는지를 설명하는데 한 장을 할애한다.

실직자는 그냥 월급 받을 직장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쓸모 없어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수치심을 내면화하게 되는데 이는 실업이 개인의 문제라거나 실업복지정책을 세금낭비라고 주장하는 보수당 정책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지방자치 선거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이 보여주는 정교하고도 과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우리가 늘 그 놈이 그 놈이라고 말해 온 후보들 중에 분명히 덜 해로운 정치인이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라면 다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이번 선거에서 무엇보다 관심 가는 것은 전국의 교육감 선거다. 교육감 선거는 정당공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덜 해로운 후보들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수치심을 재생산하는 교육정책과 평등을 재생산하는 교육 정책이 선명히 대비된다. 투표권도 없는 주제에 (지방자치 선거권자는 지방 거주자에 한하므로 해외에 체류중인 경우 투표할 수 없다) 밤 낮 선거 기사를 뒤적이며 마음으로 빌고 있다. 제발 아이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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