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표 객원기자

▲ 이재표 기자
인간은 문자를 포함한 고등 언어체계를 가졌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모호하고 비경제적이다. 동물들은 몇 가지 소리와 몸짓언어로 소통하지만 오히려 오해나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언어가 단순하다보니 이종(異種) 간에도 몸짓과 느낌으로 통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한국 개가 미국이나 일본에 간다고 답답할 리도 없다.

역으로 인간은 언어의 모호함을 악용해 상대의 판단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그냥 ‘잘못했다’고 하면 될 것을 어렵고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해 기만하는 것이다. 사실 잘못을 비는 데는 허리를 숙이고, 솔직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최고다. 중언부언보다 눈물은 훨씬 더 진정성이 있다.

언어를 교란해 진정한 사과를 회피해 온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거짓사과다. 아베 총리는 2013년 11월 종군위안부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통석(痛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협력위원회’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한 얘기다.

이에 앞서 1990년 5월 아키히토 일왕도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통석의 념(念)을 갖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사전에도 없는 이 말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우리 정부는 ‘유감표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통석의 ‘석(惜)’은 ‘아깝다, 아쉽다’라는 뜻이다. ‘석별(惜別)’은 ‘아쉬운 이별’이다. 또 ‘애석(哀惜)’은 ‘슬플 만큼 아깝다’는 뜻이니 ‘통석(痛惜)’은 ‘아프도록 아깝다’는 의미다. 따라서 통석은 사과나 유감은커녕 식민통치가 끝난 것에 대한 깊은 한탄일 뿐이다. 일본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 공동선언에서 ‘통절한 마음으로 사죄한다’고 명문화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시 통석이라니, 일본의 역사인식은 1990년으로 회귀한 셈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중에도 통석만큼이나 귀에 설은 단어가 있는데, 바로 ‘적폐(積弊)’다. 박 대통령은 4월29일 세월호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이 끝나고 국무회의가 있는데 그동안 쌓여온 모든 적폐를 도려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적폐란 ‘오랜 기간에 걸쳐 쌓여온 폐단’이라는 뜻이다. 박 대통령은 5월 19일 세월호 관련 담화에서도 ‘관피아(관료, 마피아의 합성어)’의 오랜 폐단에서 사고가 비롯됐음을 거듭 밝히며 ‘국가개조’라는 말을 사용했다.

먼저 적폐는 모든 문제를 ‘잘못된 관행’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여기에서 개혁이라는 단어 대신 굳이 ‘개조’를 선택한 이유도 간파할 수 있다. 개혁은 고쳐야할 주체와 대상이 일치된 말이다. 문제를 함께 혁파하자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개조는 고치는 선한 세력과 고침을 당해야하는 악한 대상으로 분리돼 있다.

실제로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그동안 정부는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행과 제도를 바꿔서 정상화화기 위한 개혁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 작업을 서둘러 진행해서 이런 잘못된 관행들을 미리 끊어버리지 못하고…”라며 결국 국가개조가 필요함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대통령의 눈물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를 통감하며 개혁하고자 하는 지도자의 눈물은 자연스럽고 국민에게도 공감을 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오직 쌓여온 폐단만이 문제고, 자신에게는 이를 개조해야할 사명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 순교자적 사명 때문에 울었다면 할 말이 없다. 다만 국민정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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