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브라운의 흥미있는 과학소설 <인페르노>

김성수
충북대 전기공학부 교수

일전에 다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이 저술한 <인페르노>라는 과학소설을 읽고 흥미 있는 구절들이 있어 적어 본다. <인페르노>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구성하는 세 권의 작품 가운데 첫 번째 책 이름이며, 14,233해에 달하는 대서사시 <신곡>은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연옥을 거쳐 결국은 천국에 도달하는 단테의 숨막히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책 속의 천재 과학자는 인류의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인간이 멸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대응책을 연구하게 된다. 그는 세균을 사용하여 인류의 인구를 조정하고자 하는데, 그 방법으로 유전공학의 기술을 이용하여 인류의 DNA 구조를 바꾸는 세균을 개발하여,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생물학적 방법을 통하여 인구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

우리는 대개 인구의 증감은 자연스레 조절된다고 여기지만, 소설 속에서는 세계보건기구의 자료를 들먹이며, 인구의 증가는 결국에는 인류의 파멸을 가져 올 것이라 현실성과 가능성 있는 가상을 한다.

신의 영역을 도전?

▲ 제목: 인페르노 지은이: 댄 브라운 옮긴이: 안종설 출판사: 문학수첩
이야기 속의, 인구의 증가는 인간의 멸망을 가져 올 것이라는 명제는 한 천재 생물학자가 신의 영역을 침범한 가상 하에서 재미있는 사건들을 엮어 간다. 천재적 과학자가 개발한 미생물이 인간의 염색체 구조를 변경하여 그러한 인류의 위기상활을 막아보고자 했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사실은, 이 책을 읽어가는 도중에 인류의 인구의 적정선이 유지되도록 누군가가 설정한 프로그램에 의해 인구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는 생각이 참으로 재미있고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랭던이란 책 속의 화자는 전염성이 강한 세균인자로서 인간의 DNA를 변형시키는 미생물을 연구하여 인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러한 기술이 위정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경우에 인류의 앞날을 보장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이 기술이 위정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참 씁쓸한 현실이 투영된 부분이다.

책 속의 천재적인 과학자처럼, 우리 인간들 중 누구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아니, 우리들 각자의 마음 곳에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신의 위치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2014년의 오늘도, 매 순간 수없이 많은 과학기술들이 연구되고 개발된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인류의 옆에 서게 될 것일까?

댄 브라운은 그의 저서 <인페르노>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학자들은 순수한 학문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지만, 그 결과물이 어떠한 결과를 인류에 가져다 줄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을 항상 새로운 기술의 언저리에 서 있게 한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스스로의 진화 과정에 참여할 도덕적 책임을 갖는다는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이 막 그림자 속을 벗어나 주류로 올라오고 있다. 인간은 종을 더욱 발전시키고, 보다 나은 인간을 만들기 위해 유전공학적 기술로 더 건강하고, 더 강하고, 더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간을 탄생시키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자연스런 진화과정과 충돌을 일으킨다는 쪽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유전공학 또한 자연스런 진화의 과정의 하나이니, 이 지극히 자연스런 전개 과정을 우리 인류는 이것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여야 하기 않을까라고 말한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들먹이며 소설 속의 화자들은 유전공학과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과학과 유시화의 시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각과 생활의 패러다임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왔고, 그에 따른 인간의 해결된 고민과 문제 보다는 또 더 많은 숙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시점에 인간을 몰아세우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무기들을 만들어 왔고, 그 이무기들로 인하여 인간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는 대상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에 두고 설정된 소설 <인페르노>는 흥미로운 차원을 뛰어 넘고 있다.

소설이니까 물론 허구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수 천만년 전에 우리의 염색체의 서열을 강탈당하여, 누군가가 조절해 놓은 시간의 함수에 따라 정해진 운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설마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 문득 유시화의 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가 떠오른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누군가가 우리의 권한으로부터 강탈하여 그의 마음대로 정해 놓은 생각의 틀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잊고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유시화 시인이 읊은 것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들의 자신을 찾기 위하여, 우리 안의 우리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운명이라는 틀을 부정하고 싶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산뜻하게 지워지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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