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諸葛亮)은 원래 미천한 신분으로 양양(襄陽)땅 깊은 곳에 숨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제(齊)나라 명상(名相)이었던 관중(管仲)과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 비유하였지만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뜻은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펼칠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비 현덕이 그를 찾아옵니다. 유비는 은사(隱士)였던 사마휘(司馬徽)로부터 “천하를 논하려거든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를 얻으라”는 조언을 듣고 의형제인 관우, 장비와 함께 예물을 싣고 수소문 끝에 심산(深山)으로 ‘복룡’인 제갈량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갈량이 번번이 집을 비워 가까스로 세 번째만에 야 겨우 상면을 하게 됩니다.
유비는 큰 절로 예를 올리고 “천하에 나가 함께 난세를 구하자”고 간청합니다. 제갈량은 험로를 마다 않고 세 번씩이나 누옥(陋屋)을 찾아 온 높은 덕과 비범함에 감동, 이른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하고 유비를 따라 세상에 나옵니다. 후세는 이를 일러 ‘삼고초려(三顧草廬)’라 하고 두 사람의 만남을 물고기와 물에 비유하여 수어지교(水魚之交)라 하였습니다.
소문대로 제갈량은 비범한 책략으로 유비를 도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그때마다 큰 전공을 세웁니다. 한왕조(漢王朝)가 망하자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는 제위에, 건국의 일등공신인 제갈량은 승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제갈량은 유비가 세상을 떠난 뒤 국정을 총괄하면서 유선을 도와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의 사마의(司馬懿)와 오장원에서 대진 중 병몰(病沒)하고 맙니다.
제갈량이 위(魏)와 싸우기 위해 출진할 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극찬을 받을 만큼 만인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신이 비천한 신분임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으시고 외람 되게도 몸을 낮추어 제 초옥을 세 번씩이나 찾아오셔서 당시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감격하여 선제께 달려가는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라고 유비의 지극했던 정성에 대해 뜨거운 소회를 보입니다.
역사는 전략가로서 제갈량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물론 제갈량이 훌륭한 전략가인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훌륭한 것은 그의 ‘인간적 신의’입니다.
유비는 자신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제갈량에게 후사(後事)를 부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승상이여, 내가 죽거든 저 어린 유선을 잘 돌보아주시오. 그러나 마땅치 않거든 경이 나라를 맡아 이끌어 가시오.” 하고는 눈을 감습니다. 사실 유선은 제위(帝位)를 잇기에는 모자라는 위인이었습니다. 유비는 그것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끝까지 신의를 버리지 않고 죽는 날까지 유선을 보좌했습니다. 멀쩡하게 힘을 가진 자도 끌어내려 자리를 뺐는 게 권력의 속성이지만 그는 끝까지 그런 패륜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를 잊지 않고 부자 2
대에 대해 끝까지 눈물겨운 충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나는 제갈량의 그런 인간성을 그 무엇보다 높이 평가합니다.
또한 유비의 깊고 넓은 도량 역시 훌륭합니다. 삼고초려를 마다 않고 제갈량을 찾아갔을 때 유비의 나이 마흔 일곱, 제갈량이 스물 일곱 이었습니다. 자식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그것도 몇 차례나 허탕을 쳐가면서 찾아가 무릎을 꿇고 한실(漢室)의 부흥을 도와달라고 읍소합니다. 인재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유비의 지극정성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천하를 놓고 쟁패를 벌이던 전국시대에는 불세출의 영웅호걸도 많았지만 그들이 남긴 교훈은 오늘 또한 불변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총리가 될 사람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몸을 바칠지, 자못 궁금하기만 합니다. 누가 그랬던가,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문제는 사람’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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