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케 한 영화 <씨받이>

김태종
삶터교회목사·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박정희 정권의 한창 자랄 때 나는 영화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야말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영화를 보러 다니고, 그 재미에 흠뻑 취하곤 했는데, 그러다가 소설에 맛을 들이면서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영화의 투박함 때문에 영화와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영화를 안 보고 살지만, 영화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어느 무렵 심란한 일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영화나 보자고 해서 갔던 노량진의 어느 극장, 거기서 그저 편안하게 보고 오자고 했던 영화가 내게는 엄청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감동적인 영화가 어떤 것이었느냐고 묻는 이가 종종 있었고, 내가 ‘그게 어떤 영화였다’고 하면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곤 하게 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는 다른 게 아니고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닥터 지바고’라든가, ‘노틀담의 꼽추’와 같은 영화들이 삶과 세계, 그리고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면서 큰 울림으로 남아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무협영화라든가 액션영화에 탐닉했던 적도 있지만, 이 영화만큼 크게 다가와 내가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지속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단연코 없지 않겠는가 싶은 겁니다.

가난한 딸과 부자집의 요구

▲ 씨받이 The Surrogate Womb , 1986 한국 | 드라마 | 1987.03.21 청소년관람불가 | 94분 감독 임권택 출연 강수연, 이구순, 윤양하, 김형자
감독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처음에 그저 시끄러운 속을 가라앉혀 볼 요량으로 들어갔던 극장,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의 내용이 내게 묘한 울림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겁니다.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작은 대가를 받기로 하고 자식 두지 못하는 집의 씨받이로 들어간다는 내용, 그리고 거기에서 성에 눈을 뜨고, 이어서 부자집에서 원하는 아들을 낳아, 약속했던 대가를 받은 다음 그 집에서 나오려는데, 자신이 낳은 아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힘없는 한 여인의 그야말로 피맺힌 절규가 철저하게 묵살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때는 박정희 정권을 넘어 전두환을 거친 다음이었는데, 내게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 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씨받이라는 비인격적인 제도를 수용하는 것, 그것이 박정희 정권의 혁명과 혁명을 정당화하려는 갖가지 정치적인 술수, 그리고 이어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겹치면서 이 이야기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겁니다.

결국 목적이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아들을 얻게 된 부자집과 가난한 집의 딸이 빚어내는 갈등은 당시 군사독재정치가 하고 있는 일과, 거기에 호응하여 일궈낸 경제적 성과가 계층간 갈등으로 이어지는 현실과 그것을 가리기 위한 갖가지 술수와 거짓말들이 영화의 내용 위에 겹쳐지면서 나를 전율케 했습니다.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된 영화

영화가 끝난 다음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서 나가기 시작했지만, 나는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아무 힘도 없는 아버지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했고, 다들 나가버린 휑한 극장 안에 혼자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홀린 데서 깨어나듯 일어나서 나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후 아주 바쁜 나날을 살면서 영화와는 더 거리를 쌓게 되었고, 때때로 좋은 영화라고 소개를 받고 반은 남의 의사에 의해 극장엘 가긴 했지만, 아직도 내게는 그만한 울림을 주는 영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힘없는 사람들이 눈에 띌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그 때 양심적 선택을 하게 한 중요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지금도 영화 이야기를 한다면 늘 첫째로 꼽는 것이 바로 ‘씨받이’입니다.

영화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따금 그야말로 좋은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괜찮은 영화가 나왔을 때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근래에 괜찮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긍정적인 방향에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만한 무게의 영화라면, 그것이 어떤 영화이건 소중하지 않겠느냐는 말과 함께 ‘내 인생의 영화 한 편’으로 ‘씨받이’가 있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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