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중턱으로 치닫는 농촌 들녘엔 흙내를 맡은 벼가 서너 뼘 이상 커 오르고 있다. 계절의 변화에 가장 예민한 것은 역시 자연이다. 이름 모를 들풀도 덩달아 일어나 산바람에 춤을 춘다. 무수리의 태생으로 숙종, 경종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쓴 영조 임금의 태실(胎室)은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뒷산에서 망향가를 부른다. 원래의 위치인 산 정수리 태봉을 떠나 얕은 구릉지대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아니, 왕의 태실이 이리 저리 밀려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역사의 아픔이 도사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전국에 산재한 왕과 왕자의 태실이 수난을 겪었다. 일제는 상당수에 달하는 태실, 태항아리를 창경궁으로 옮겼고 더러는 도굴꾼도 설쳐댔다.

영조의 태실이 있던 원래자리인 태봉(胎峰)은 무성리 들판을 굽어보는 길지다. 태가 묻혔던 곳은 마치 여인이 임신을 한 형국이다. 태실석은 태항아리가 들어가는 태함과 뚜껑인 덮개돌로 구분되어 있다. 화강암을 잘 다듬어 태함을 만들고 그 안에 태항아리를 안치하는 것이다.

일제는 태실석을 흩어놓은 채 그 안의 태항아리만 창경궁으로 가져갔다. 이 통에 태함, 난간석, 태실비는 산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일부는 골동품상을 전전했다.

태실이 이처럼 볼품 없이 망가지자 어느 만석지기 부자가 이곳에 민묘를 썼다. 이 때문에 영조 태실은 제 위치를 떠나 있다. 태실 전면에 있던 태실비는 마을 앞으로 이사를 갔고 태실 후면에 있던, 영조가 태어날 당시 세운 왕자 아지씨 태실비(王子阿只氏胎室碑)는 반세기 이상을 곳곳에서 유랑하다 지난 1991년 대구 골동품상에서 발견되어 이곳으로 되가져왔다.

마을 입구에 있던 태실비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는 새김 글씨가 분명하다. 청원군은 1982년 흩어진 태실 석재와 전면 태실비, 그리고 후에 귀향한 후면 아지씨태실비를 재구성하고 결실된 난간석과 동자석을 짜맞춰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재현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위치엔 엉뚱하게도 민묘가 들어서 있으니 앞으로 풀어야할 숙제다. 없어진 난간석 일부도 다시 찾았으므로 옛 것으로 환원했으면 한다. 태실은 왕과 왕자에 따라 규모가 판이하게 다르다. 왕자로 태어날 당시에는 태함을 묻어두었다가 후에 왕으로 즉위를 하면 지상으로 노출시키며 난간석, 동자석 등 석물로 치장한다.

1695년(숙종 21)에 영조가 태어나자 무성리 뒷산에 태를 묻었는데 영조 임금은 민폐를 걱정하여 태실의 가봉(加封:임금의 격식에 맞도록 치장)을 5년간 미루다가 1729년, 가봉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충청도 각 고을에서는 경비를 분담하고 공사에 참여하였는데 그 과정을 소상히 적은 ‘영조대왕 태실가봉의’는 태실에 관해 전해지는 유일한 기록으로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170호로 지정돼 있다. 태실 아래로는 성모재(誠慕齋)라고 쓴 편액이 걸린 팔작집과 맞배집 행랑채를 단 ㄱ 자 모습의 팔작집이 있는데 바로 태실을 관리하던 건물이다. 조선말기 까지는 8명의 수호군을 두어 이를 관리케 하였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국기가 문란해지자 세도 있는 민간인들도 왕의 흉내를 내어 명당에 태를 묻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를 ‘민태봉’이라 한다. 영조대왕의 고함소리가 시공을 초월하여 들릴 만도 한데 들녘엔 경운기가 덜커덕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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