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를 설명할 수 없지만 도취된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김한기
CJB청주방송 PD

고백하건데,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Le Double Vie de Veronique, 1991)>을 보게 된 동기는 불순했다. 자고로 제목이 ‘○○의 이중생활’인 영화 치고 나의 불순한 동기에 어긋나는 영화는 없었다. 나의 성장기는 영화 <애마부인> 포스터를 보며 영화를 상상(?)하고, 삼류극장에 잠입해 <무릎과 무릎사이>를 보며 현실을 상상하던 시대였다.

대학시절, 8·90년대 나름 엄중하던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영화는 여전히 일탈의 창구이자 학교였다. 홀로 극장 간판들을 두리번거리던 끝에 여러 화제작들을 뿌리치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꿋꿋이 선택했던 건 바로 나의 이런 경력의 발로였다. 이렇게 보게 된 영화가 하나의 충격이 되고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가 될 줄이야.

나의 불순했던 동기는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 제목에 ‘이중생활’을 포함하는 영화였으되 이 영화는 무려 ‘예술영화’였다. 국내 수입업자가 엉뚱한 낚시성 제목을 붙인 건 아닌지 의심도 했으나 제목마저 원제를 직역한 정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난 큰 반전을 겪었다. 금세 영화에 푹 빠져들게 된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설 땐 내게서 일말의 배신감도 실망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선택의 맥락을 부정당했음에도 만족해만 하던 나 자신이 이 영화가 던진 첫 번째 충격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이 정도의 힘이 있는 영화였다.

▲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The Double Life of Veronique , 1991 프랑스, 노르웨이, 폴란드 로맨스/멜로, 판타지 청소년관람불가 | 96분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브스키 출연 이렌느 야곱, 필립 볼테르, 할리나 그리그라스제브스카, 칼리나 예드루시크
또 하나의 충격은 누구에게도 영화의 줄거리를 좀처럼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만족했던 영화에 대해서 줄거리조차 말할 수 없는 경험은 생소했다. 사실 도취를 하면 줄거리를 잊기 마련이다. 줄거리는 잘게 나누어진 시간들이 서로 연관을 맺을 때라야 비로소 형성된다. 그런데 심취한 순간이 지속되면 시간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시간을 나누지 못하고 줄거리를 느낄 수 없도록 내내 심취했었나 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영화 자체에 줄거리다운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다소 황당한 상황설정을 소개하자면, 폴란드에는 베로니카라는 젊은 여성이 살고 프랑스에는 베로니끄라는 같은 나이의 여성이 살고 있는데, 이름만 비슷한 게 아니라 둘이 똑같다. 똑같은데 다른 사람이고 둘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이를 두고 ‘도플갱어’라는 표현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고 ‘이렌느 야곱’이라는 여배우가 1인 2역을 했다. 그런데 둘은 인연도 없거니와 특별히 만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둘 사이엔 아무런 작용이 없고 결국 줄거리도 없다. ‘얽히고설키다 알고 보니 혈육’ 식의 관계가 빈번한 우리 드라마들과 비교해보면 둘 사이가 극단적으로 무관하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관계가 깊기도 하다.

가방 속 물건을 내보인 사랑

그런데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어느 날 죽는다.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였을 거다. 하여튼 죽는데 그 시기 이 소식을 알 리 없는 프랑스의 베로니끄가 근원 모를 슬픔을 느낀다. 혹은 근원적인 슬픔일 수도 있다. 놀라운 건 그 맥락 없는 베로니끄의 슬픔에 내가 취했다는 것.

베로니끄의 슬픔이 마법처럼 가슴에 묵직하게 들어왔다는 것. 그 공감의 불가해한 끈이 무엇보다 놀라웠고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모든 맥락의 복잡함을 한 순간에 뛰어넘는, 마치 우주공간의 웜홀과도 같은 빛나는 공감의 통로. 영화처럼 내 감정의 울림을 그대로 공명하는 이야 없겠지만, 어느 한 구석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누군가와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빛나는 공명의 영역은 비워둬야지.

내 것, 내 사람 먼저 우악스럽게 챙기느라 울타리를 만들지 말아야지. 누구라도 거리가 멀다고 혹은 인연이 없다고 해서 먼 사람만은 아닐테고, 오히려 그 누구보다 나를 닮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베로니끄가 사랑을 시작한다. 인연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일까. 사랑이 시작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간결하다. 물론 사랑은 충분히 격정적이다. 우리는 흔히 기막힌 우연들이 누적되어 이어지는 사랑을 ‘영화 같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같은 사랑’의 새로운 형식미를 두루 발견한다. 섬세하게 절제된 열정이 한 순간에 빛을 내며 이루는 사랑들 또한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색, 계>의 사랑이 그러했고, <어톤먼트>의 사랑이 그러했고, <번지점프를 하다>의 사랑이 그러했다. 베로니끄는 사랑을 처음 시작하면서 자신의 가방 속 물건들을 쏟아내 연인에게 보여준다. 고독을 털어내는 훌륭한 상징적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긴장감은 있으나 두려움은 없다. 누군가 내게도 자신의 가방 속 물건들을 하나 둘 보여준 적이 있다. 영화 속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내게는 ‘데자뷰(deja vu)’와도 같았다. 나 또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평소에 열정을 좀 더 섬세하게 가다듬어야만 한다.

이처럼 영화를 보게 된 과정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내게 있어선 ‘맥락의 배신’으로 점철된 듯한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블루>, <레드>, <화이트>의 삼색시리즈로 유명한 폴란드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작품이다. 삼색시리즈가 유럽의 통합과 관련한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고들 하던데, 이 영화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읽는 이들도 있다.

사실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는 한 번 마주쳤다. 베로니끄가 폴란드를 여행할 당시 바르샤바의 시위현장을 마주치게 되고 이를 담기 위해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때 시위현장을 우연히 지나던 베로니카가 베로니끄의 사진에 찍혔던 것. 나중에야 비로소 필름을 보고 자신과 똑같은 존재가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베로니끄. 그때 그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마저 얘기하면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께 무례가 될 듯하다. 끊임없이 고독한 우리는 그러한 존재와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 혹은 지구상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내면에 내가 깃들어 있어 찰나의 교감만으로도 공명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어떠할까. 상상만으로도 애틋하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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