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인쇄’ 김남식씨 별세, 80년대 시국유인물 인쇄 청주 민주화운동 헌신

한국 민주화운동의 최정점이었던 80년대 후반, 청주 대학가에서 활동을 펼쳤던 운동가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불법(?) 시국유인물을 인쇄해 주고 소주잔까지 채워주던 큰 형님 같던 이가 그리워서였다. 25일 청주성모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고 김남식씨(향년 60세)의 빈소가 마련됐다. 작년 가을 위암말기 진단을 받고 췌장으로 전이되면서 병세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청주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회장을 맡았던 김성구씨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다는 얘길듣고 수일내로 찾아뵈려 했는데, 이렇게 가시게 해 너무도 죄스럽다. 어렵게 인쇄소를 하면서도 의리와 정이 넘치던 분이었다. 5공화국 시절 생업까지 있는 분이 청주민청 발기인으로 선뜻 참여하시는 걸 보고 내심 놀랐었다. 주변에 퍼주기만 하시고 자신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살다 가신 분”이라고 말했다.

경남 남해 출신인 고인은 서울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일하다 80년 중반 청주로 내려왔다. 변변한 학벌은 없었지만 서울 카톨릭노동청년회에 참여할 만큼 사회현실을 읽는 눈이 있었다. 청주에 살고있던 처형들을 연고로 충북도청앞에 ‘교동인쇄’라는 작은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이른바 ‘가리방’으로 일일이 글씨를 써서 유인물을 찍던 때였다. 하지만 교동인쇄에는 1세대 타자기라 할 수 있는 청타인쇄가 가능해 대량으로 빨리 찍어내는데 그만이었다.

청주문화사랑모임 정지성 대표는 “전두환 시절에 청주에서 누가 감히 시국유인물을 인쇄해 주겠는가. 남식이 형님이 두말없이 다 처리해주셨고 결국 경찰에 꼬리가 잡혀 압수수색 당하고 수차례 연행조사도 받고 했다. 그 와중에도 쫓겨다니는 우리들 힘내라도 술도 사주고 차비도 주고 하셨던 기억이 아련하다”고 말했다.

운동권 대학생들의 동지이자 큰 형님 역할을 했던 고인은 청주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붓글씨 필력도 뛰어나 자료집, 성명서의 큰 글씨는 자신이 직접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법처리를 당한 전력이 없어 민주화운동 유공자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생업에 전념하던 고인은 인쇄소를 접고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2년 대선 때는 청주 노사모 대표로 특유의 적극성을 발휘해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발병전까지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묵묵히 가장의 역할을 다했다. “형님! 부디 고단했던 삶에서 벗어나 울분을 토할 일 없고, 분노할 일 없는 평안한 곳에서 편히 잠드소서‥” 민주당 정책위 정균영 부의장이 페북에 남긴 마지막 인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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