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재표 그림: 옆꾸리


문무왕 대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승려는 우애가 있어 밤낮으로 이렇게 약속하였다.
“먼저 서방으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 알리자.”

그 후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숨어 신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처자식을 데리고 살았고,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화전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게 물들고 소나무 그늘에 어둠이 깔릴 무렵, 엄장의 집 창 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벌써 서방으로 가네. 자네는 잘 있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게.”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바라보니, 구름 위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밝은 빛이 땅까지 뻗쳐있었다.

이튿날 그가 광덕이 살던 곳으로 찾아가 보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일을 마치자 엄장이 광덕의 부인에게 말하였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는 이를 허락하고 엄장의 집에 머물렀다. 밤이 되어 엄장이 정을 통하려고 하니, 부인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대사가 극락정토를 구하는 것은 물고기를 잡으려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해서 어찌 안 되겠소.”

부인이 말하였다.
“남편과 나는 10여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몸을 더럽혔겠습니까?” <삼국유사 감통 제7 광덕과 엄장 중에서>

이 이야기를 믿으란 말인가? 광덕과 그의 아내는 10여년 동안 함께 살면서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한 적은 없는데, 분황사 서쪽마을에 숨어 처자식을 데리고 살았다니 말이다. 그래도 삼국유사 아닌가? 기이한 일과 은혜로운 일, 하늘이 감응하는 일이 많았던 옛날 옛적의 일이고, 그랬다고 하니 믿는 척이라도 해주자. 그럼 이건 또 어떤가?

명박왕 말기에 새누리와 민주라는 두 정당은 우위를 점하려 국민에게 이렇게 약속하였다.
“다음 지방선거에서는 기초에 대한 공천을 반드시 폐지하자.”

그 후 대선에 승리한 새누리는 정당공천을 폐지하려니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했고, 지지율 10%에 턱걸이한 민주는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어느 날 새누리의 붉은 빛으로 세상이 물들고 민주당의 소나무에 어둠이 깔릴 무렵, 새누리가 민주에게 대놓고 말했다.

“우리는 벌써 정당공천으로 가네. 자네도 잘 생각해 보고 빨리 나를 따라오게.”
민주가 문을 밀치고 세상을 바라보니, 선거구도에는 먹구름이 끼고 새누리의 콧노래가 땅 끝까지 뻗쳐있었다.

국회에서 정개특위가 열리고 보니 공천폐지는 과연 물 건너간 꼴이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대선공약이었던 정당공천제 폐지에 대한 대통령의 조속한 입장표명을 요구했다.
“대통령이 후보시절 약속했으니 우리와 함께 지키는 게 어떻겠소?”

새누리는 대통령이 약속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의 문제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상향공천을 하면 오히려 민주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대들이 정당공천을 폐하려는 것은 물고기를 잡으려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민주가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대통령도 이미 그런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안 된다는 거요?”
새누리가 말하였다.

“역대 대통령의 공약 이행률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무(無)공천하고 우리는 상향식으로 공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초선거에 대한 정당공천 폐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가 합의한 국민과 약속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는 것이다. 시기상조이거나 신념이 바뀌었다면 설명하고, 사과할 게 있다면 사과해야한다. 정치인의 공약을 믿었던 국민들만 또 바보가 돼야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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