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앞서 걸으며 동학의 골짜기로 안내하는 김용휘의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

권은숙 동학보은취회접주

중학교 3학년 때 새벽마다 귀신이 나타났다. 머리를 풀어 헤친 소복 입은 여자가 ‘공·부·해·야·지’했다.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무서웠다. 등 뒤에 서 있는 귀신을 느끼며 책상에 앉아 죽어라 책을 읽었다. 변변한 참고서가 없던 터라 교과서를 거의 외웠다. 성적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사정 모르는 담임은 기특하다 옷을 사주며 공부비결이 뭐냐 물으셨다. 석 달 정도 계속 된 귀신의 등장으로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었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만큼 건방져 졌다.

그 후로 샤워 할 때마다 나타나는 할배 귀신, 새벽녘 만트라를 외며 받아 적으라고 윽박지르는 스님귀신, 예수처럼 40일 금식하라 꼬시는 아줌마귀신, 자취방에 깃들어 훔쳐보는 남자귀신 등등 숱한 귀신을 만났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싫었다.

아침 냉수마찰과 채식을 집어 치웠고, 부지런히 술을 마셨으며 간간 담배도 피웠다. 땅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싶었고, 마르크스를 사랑하게 되면서 유물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활동가이면서 완벽한 유물론자가 되지 못 하는 스스로를 ‘자격미달’이라 여겼고 종종 괴로웠다.

▲ 제목: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 지은이: 김용휘 출판사: 책세상
책 소개를 해야 하는데 들어가는 말이 길어 졌다. 오랫동안 말 하지 못 했던 귀신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동학사상의 ‘불연기연(不然基然)’이 내게 준 해방감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불연은 ‘그렇지 않은 것’ ‘가늠하기 어려운 것’ 으로 증명할 수 없고 논리적 추론으로 알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기연은 ‘그러한 것’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거나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동학은 사람의 삶과 세계가 불연기연에 동시에 기대어 있다고 한다. 만물이 드러난 현상의 원인을 탐구해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숨겨진 질서로서의 불연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 20년 불연한 것을 배제하려 애쓰느라 몸을 망친 기연에 닿아 있는 나는, 동학사상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

물리학·철학·종교를 두루 통섭한 저자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의 저자 김용휘는 유년시절 교회에 다녔고 우주의 원리를 알고 싶어 물리학을 전공했다. 대순진리회에 머물기도 하고 동양철학으로 인생의 이치를 배우겠다며 늦게 대학원에 진학도 했다.
한 학기 만에 철학에 대한 기대가 깨져 다시 방황하다가 지리산에서 도인을 만나고, 선배 소개로 정신적 방황의 종지부를 찍을 스승을 만났으며, 동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책을 쓰게 된 동기’에서 밝힌 부침 많은 저자의 삶을 통해 고민의 깊이를 짐작할 뿐이지만 물리학과 철학, 종교를 두루 통섭한 저자의 글은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담백하다.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은 함께 산책 하듯 한발 앞서 걸으며 동학의 깊은 골짜기로 초심자를 안내한다. 눈을 찌르는 나뭇가지를 옮겨주고, 마구 자란 풀들을 눕히며, 걸려 넘어질 돌을 치워 뒤 밟아 오는 걸음을 배려한다. 새로운 학문의 방법론으로 ‘불연기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 동학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유불선의 혼합으로만 동학사상을 이해해도 될지, 동학의 독창성은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는 이성의 합리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심연의 깊이를 회복하는 것을 강조하며, ‘불연’이면서도 ‘기연’인 지혜를 따라 새로운 세기에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역설(力說)도 한다. 또 인간 내면의 영성에 대한 자각으로 병든 문명을 치유할 지혜를 찾는 학문의 길에서, 동학은 조선민중의 고통을 위로했던 이 땅의 자생적 학문이자 철학이기 때문에 자본축적에 따른 생명파괴를 극복 할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안내에 따라 책을 읽어가다 보면 엄혹한 시절을 살아 낼 기운이 시나브로 충전이 된다.

다시 갑오년이다. 120년 전 동학농민군이 목숨을 던져 이루고자 했던 ‘사람이 곧 하늘’ 인 개벽세상을 나도 꿈꾼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철학이자 학문인 동학이 민중민권 혁명의 전통을 잇고 있음을 기억한다. 보름달 뜬 밤 검무를 추며 개벽 세상을 꿈꾸던 동학농민군이 그립다면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을 읽어보시는 것이 어떠할까.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