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편견을 민낯으로 마주하다
상태바
우리 안의 편견을 민낯으로 마주하다
  • 충북인뉴스
  • 승인 2014.02.06 0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를 보고
권단 옥천순환경제공동체 운영위원장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1999년 미국 킴벌리 피어스 감독)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잔상이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붉은 인두자국처럼 강하게 남아있다. 영화내용은 대략 이렇다. 미국 네브라스카 주의 링컨이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티나 브랜던(힐러리 스웽크)은 절도 혐의로 수배 중인데 남장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풀즈라는 작은 시골마을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렇게 남장 여자인 티나 브랜던이 남자로서 마을 주민과 친분을 맺다가 여자임이 밝혀지면서 벌어지는 마을의 잔혹한 일상이 주요내용이다. 남자로서 굉장히 우호적인 관계로 마을 사람들과 지내던 브랜던은 뒤늦게 여자임이 밝혀지면서 이웃들에게 성폭력까지 당하면서 인간 이하의 수모를 당한다.

그것은 단지 거짓말을 했다는 것 이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보수적인 시골사회에 작동하면서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는 정말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의 착한 이웃들이 얼마나 순식간에 야만적으로 변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면서 나는 어떨까? 나도 그렇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오랫동안 체제에 의해 교육되고 쌓이고 쌓여온 편견들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드러나고 발현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나에 의해 그 사람들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등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등이 부지불식간에 묵인과 방임으로 또는 동조로 정말 약한 소수자에게 잔혹한 폭력을 행할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간 것이다.

▲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 미국 | 드라마 | 2000.03.11 | 청소년관람불가 | 118분 감독 킴벌리 피어스 출연 브렌단 섹스턴 3세, 피터 사스가드, 클로에 세비니, 힐러리 스웽크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무서웠고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나는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만나지 못한 것들을 어느 순간 마주하게 될 때 회로가 엉키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 까 고민하게 된다.

그 때 생각이 없으면 스스로 생각할 힘이 없으면 체제 교육이 미디어가 가르쳐준대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혐오들이 얼마나 폭력으로 다가오는지 소수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폭력으로 다가오는지 영화는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는 우리 현실로 놓고 볼 때 ‘빨갱이’라는 레드 콤플렉스와도 연결된다. 과거 옥천신문 기자로 보도연맹과 관련한 취재를 할 적에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그 상흔이 남아있어 할머니는 보도연맹에 대한 증언을 꺼렸다.

한참을 설득한 끝에 할머니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이야기를 했다. “왜 그걸 이제 와서 물어. 얼매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 때 남편, 시아주버님 끌려가서 죽고 평생 한만 갖고 살았지.” 아비 자식 할 것 없이 끌려가서 소리 소문없이 죽어갔던 것을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체제가 잔인한 폭력으로 대했던 내상들은 고스란히 사회에 이식되어 민들의 기억을 지배한다. 체제가 가한 폭력들은 짙은 내상을 남기면서 자기검열을 하게 되며 피해를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기제가 작동하면서 다수의 편에 본능적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자식이 성소수자이거나 선천적인 장애가 있다면 부모들은 본능적으로 감추려 하고 드러내려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부모를 욕할 게 아니다. 부모들은 이 사회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내 자식이 만일에 알려지면 사회의 냉대와 소외를 받을 거라는 것을 몸으로 알기 때문에 감추는 것이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일수록 부모들은 걱정을 하고 그 걱정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부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는 과연 좋아졌을까? 아직 편견은 시퍼렇게 살아있다. 백인과 흑인 동남아인에 대한 다른 편견들, 학벌에 대한 편견, 지역에 대한 편견, 남녀에 대한 편견, 직업에 대한 편견, 직장에 대한 편견, 노동자에 대한 편견, 농민에 대한 편견 등이 고스란히 우리의 일상에 살아있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일상으로 다가왔을 때 너무도 천박하게 작동하는 것을 체감하고 이내 절망할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가?



이 잔혹한 체제의 교육이 그대로 이식되면서 꼭두각시처럼 생각하고 움직거리는 자신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취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을 가끔 한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말이다. 어떤 소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람을 보지 않고 사람 그대로 생명 그대로 보아야 하는데 사회가 정해준 편견이 고스란히 이식되면서 서로를 갉아먹는 사람으로 생명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의 체제가 그것을 특정짓고 조장하면서 감정을 왜곡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약한 자는 돕는다. 이 말은 보통 마을 향약에 다 들어있는 구절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체제에 의해 이식된 선입견과 편견은 다 걷어버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봤으면 좋겠다. 내가 영화를 보고 강렬하게 느낀 점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 안의 편견을 어떻게 솔직하게 마주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걷어내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누구의 일도 아니라 성큼 나의 일로 우리 가족의 일로 다가올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다시 주술처럼 외어본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자. 생명을 생명으로 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