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충북민예총 부회장

▲ 김기현 충북민예총 부회장
예술이 밥 먹여 주냐? 예술 한다고 밥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 사실 인간에게 먹는 것 즉 밥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밥은 사전적 생물학 의미보다 인문학적 의미의 한 단어로 그 가치가 크다.

그 예술이 대중 예술이 되었건 순수 예술이 되었건 밥을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문화를 밥으로 생각하고 문화가 삶의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이지 않을 때는 늘 배 고플 수 밖에 없다.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다르고 국가 마다 다르다.

프랑스사람은 불편한 것은 견딜 수 있지만 아름답지 못한 것은 못견뎌 한다. 한국 사람은 어떨까? 우리는 아름답지 못한 것에 큰 불만은 없어도 불편한 것은 견뎌내질 못한다. 실용이 우선인 우리에게 시각이 그 다음인 건 문화 이전에 밥이 우선이었던 긴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 예술이 상업화 되고 돈이 된 것은 도시 산업화와 무관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이면서 스스로 문화를 만들고 일과 놀이가 함께 하는 문화는 노동의 가치를 대중문화가 이해를 하고 분리되지 않은 밥의 한 종류 이었다. 문화산업이라는 별칭을 사용한 프랑크푸르트학파들은 자본이 만든 문화상품은 노동자의 비판의식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즉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문화 상품은 조작된 오락과 정보산업을 양산하여 참여의식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문화산업으로 부를 축척한 문화 제국주의를 양산하여 중심부 국가가 주변부 국가를 종속시킨다는 이론이다.

우리말 중에 변죽을 울린다는 말이 있다. 그릇, 북을 직접 가운데를 치지 않고 주변을 쳐서 복판을 울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의역을 하면 바로집어 지적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에둘러서 말을 하여 눈치를 채게 하는 뜻으로 쓰이는데 우리네 조상들이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게 하려는 참마음이 숨어있는 좋은 뜻이다.

종속되지 않는 문화가 제나라 문화이고 제 동네 문화이다. 복판의 소리에 덩달아 내는 주변의 소리는 자신의 문화를 가지지 못한다. 문화산업으로 아시아 전체를 흔드는 유럽, 미국의 문화에 늘 주변일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이제 우리의 소리를 가지고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많은 대중 소비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문화예술에는 공감과 감동이라는 힘이 있다. 감동이 공감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고 소통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감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찌 문화 예술에 견 줄 것인가? 거기에는 아름답다는 대자연 그리고 맑다는 공기를 환경학적이나 물리학적인 전문용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공감하는데 무리가 없다. 자연 예술의 느낌그대로 모두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개인의 삶의 방법을 바꾸고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문화예술은 알고 있다.

순수와 대중 예술이 중심에 종속되지 않고 주변이 중심부를 울릴 수 있는 문화의 힘을 만들어야 한다. 문화예술이 바로 밥이 되거나 빵이 될 수는 없다. 삶의 경쟁력은 문화에서 온다. 하지만 밥만을 위해 대중에게 보급되는 예술은 밥이 끝난 후에 더 고단한 허기가 오고 그 허기는 광기로 전락해 버린다.

shift는 변천, 변화, 변동, 전환, 둘러대는 수단, 속임수, 술책 등등의 뜻이 있다. 컴퓨터가 나온 후 유명해진 녀석이다. 여러 모로 쓸모 있게 만든 하나의 키인데 변화가 무쌍하고 뜻도 바꿔주는 능력자다. 아마 소통의 중간에 있는 매개능력을 가진 작은 네모 일수도 있다. 밥에 이 녀석Shift를 예술로 걸면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을까?

문화예술이 밥이 되는 때가 이미 되었는데 아직도 예술이 밥 먹여 줄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이 저작거리에서 부터 시작하여 지식인에게 까지 머물러있으니 우리 세상에 이 shift처럼 불편하게 걸어야 원하는 뜻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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