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노동인권센터 조광복 노무사, 올해의 시민운동가 ‘동범상’ 수상
천안 개업사무실 접고 6년째 청주 무료상담소 운영 한해 800건 처리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구름같은 인걸 중에 시민민중운동의 선두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이 있으니 그 이름은 조광복.~” 청주지역 시민문화운동에 큰 자취를 남긴 고 최병준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동범상. 올해 11회째 수상자(시민운동가 부문)로 청주노동인권센터 조광복 노무사(49)가 선정됐다. 지난 3일 충북NGO센터 시상식장에서 조 노무사는 “충북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저 따라 했을 뿐이다.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 이렇게 큰 상을 받게돼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덤덤한 수상 소감에 나름의 ‘썰렁' 유머도 한자락 깔았다.

“왜, 저 같은 사람에게 상을 주실까 생각해보니… 올해가 말의 해라서 말띠인 저에게 주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겨울 한철 단벌 코트를 입고 시상식장에 나온 조노무사는 축하인사를 받으며 시종 이웃집 아저씨같은 웃음을 지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조 노무사는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3남1녀의 형제들이 서울로 이사했다. ‘학업에 뜻이 없는' 고교생활울 마치고 청주와 가까운 고려대 조치원캠퍼스(현 세종캠퍼스)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건강이 좋지않아 휴학을 하고 군입대도 면제판정 받았다. 3학년 복학 시점이 바로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국이 뜨겁던 시절이었다.

얼치기(?) 운동권, 현장 노동 경력

“대학 1~2학년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냈고 3학년 복학하면서 총학생회 말단(?) 간부를 맡았다. 6월 항쟁 교내외 집회에 참여했고 그때 우리 민족, 한국 사회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 그렇다고 학내 운동권 조직에서 활동한 건 아니고 집회때면 뒷전에서 거들어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청주에도 한두번 원정 시위를 왔었다'고 하는 걸 보면 얼치기(?) 단순 가담자는 아닌 듯 싶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화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사진 찍혀 경찰에 수배되기도 했기 때문. 93년 문민정부 출범후 사면을 기대했으나 뒤늦게 화염병사용처벌법을 적용해 벌금 2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 “그 정도면 민주화 유공자 신청 사유가 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그땐 수배됐는 지도 모르고 학교 다니다 나중에 알게 됐다. 유공자는 가당치도 않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90년 대학을 졸업하고 천안, 아산 지역의 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일했다. 현장 노동운동과는 ‘절대 관련이 없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실제로 용접기술을 익힌 뒤 팀을 짜서 농촌지역 축사 건립공사를 도맡아 하는 ‘노가다' 전력도 있었다. 그렇게 현장 일을 하면서 노동법 관련 책들을 접하게 됐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사설(?) 상담역으로 6개월 정도 일하게 됐다.

“그땐 노동자 자신이 노동법에 대한 필요도 관심도 못느끼던 시절이었다. 약간의 공부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보니 보람과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97년부터 공인노무사 자격시험 공부를 시작했고 1년반만에 합격했다. 2000년에 천안에 개업사무실을 냈는데 노동자 사건 외에 사업주 자문도 많이 해줬다. 애초 생각보다 수입이 좋은 편이었다”

개인 사재로 청주 무료상담소 개설

조 노무사의 성실한 상담 태도는 금새 소문이 났고 민주노총충남본부의 자문 노무사로 위촉됐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지방노동위원회 패소사건을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뒤집어 승소한 건을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꼽았다. “버스노동자에 대한 부당해고 사건이었다. 버스 결행을 이유로 해고시켰는데, 알고보니 사업주에게 찍힌 직원을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지노위 패소 이후 내가 맡아 중노위에서 역전시킨 최초의 사건이었다”

개업이후 결혼도 하고 집도 짓고 땅도 조금 살만큼 여유가 생겼다. 민주노총충북본부의 자문 노무사도 맡아 충북지역 노동문제도 접하게 됐다. 하지만 7년 동안 개업 노무사로 일하면서 보람과 흥미가 서서히 반감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땐 차라리 농사를 지어볼까 싶기도 했다. 집앞 텃밭을 가꾸는 재미가 쏠쏠했고 사무실 일은 더이상 생기를 주지 못했다. 그때 마침 나중에 좋은 데 쓸 목적으로 다달이 저축해 온 돈이 3000만원까지 채워졌다. 2007년께 이 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할때 김남균씨를 만났다”

넘치는 상담, 노무사 1명 충원 절실

당시 충북본부 김남균 대회협력부장(현 충청리뷰 기자)과 만나 대화 하던중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무료상담의 필요성에 서로 공감했다. 김 부장은 청주에 사무실을 내자고 제안했고 조 노무사도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역할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청주행을 결심했다. 즉시 천안사무실을 정리하고 3천만원으로 청주에 사무실을 잡고 집기를 들여놓았다. 이렇게 2007년 5월 문을 연 것이 고 정진동 목사의 호를 딴 ‘호죽노동인권센터’다. 조 노무사는 보조 근무자와 똑같은 월급 110만원을 고집(?)했고 상근자 2명으로 센터 활동을 시작했다.

‘베레탕' 노무사의 무료상담은 금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대기업 KT의 인력퇴출프로그램 관리자 양심선언을 이끌어냈고 아세아제지 정리해고 노동자 복직, 청주시노인정신병원 해고자 복직, 청주시 불법 도급택시 근절 및 해고자 복직 등 숱한 해고자의 직장을 찾아주고 노동현안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보수사회단체인 자유총연맹 상근자의 부당해고 사건 수임을 놓고 민주노총측과 의견차가 생기기도 했다. 조 노무사는 똑같은 노동인권으로 접근했고 민주노총은 관변단체까지 상담지원하는 것을 마뜩해 했다.

결국 독립적인 비영리 민간상담소의 기본적인 틀을 원했던 조 노무사는 2010년 호죽노동인권센터를 사직했다. 하지만 청주를 떠나지 않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신부(당시 청주 금천동 성당)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6개월만에 김 신부를 대표로 한 청주노동인권센터가 분평동 BYC건물 4층에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현재 개인 후원회원이 470명이며 LG화학, 우진교통 등 14개 사업장 노조가 정기후원하고 있다. 한해 800건이 넘는 상담실적을 올리고 있고 노무사 한명을 충원하기 위해 여기저기 방을 놓은 상태다.

“변호사처럼 군역 대신 공익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서울 근무를 원하기 때문에 지방에서 수습 노무사를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평생 상을 받을 팔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올해 영광스런 동범상을 만나게 된 걸 보면 좋은 노무사도 결국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조 노무사는 천안 가족들과 떨어져 청주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이 있으면 주말반납은 예사고 즐겨했던 암벽타기도 손을 놓은 지 5년이 됐다. 전형적인 ‘일중독자’의 모습이다. 결국 청주노동인권센터 운영위원들이 하는 일은 “일 좀 적당히 하시고 월급도 좀 올리세요” 조 노무사의 노동인권을 걱정하는 잔소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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